먹고 있던 비염약이 똑 떨어졌다. 만성 알러지성 비염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환절기마다 컨디션에 따라 지옥이나 연옥 정도의 상태를 오고 간다.
약의 힘으로 그나마 버티고 있었던 터라 별 수 없이 병원에 가서 다시 약을 처방받아와야 했다. 하지만 내가 방문했던 병원은 환자 수가 엄청나서 대기시간이 꽤 길었다. 한 시간이 넘어가기도.
혹시나 해서 오픈 시간 조금 지나서 전화로 물어보니 이미 대기자가 20명이 넘는다고 했다.
맙소사.
이 병원은 포기해야겠다. 의사가 젊고 훈남이고 친절하지만...
다른 볼일을 보러 간 김에 집 근처 역에 있는 이비인후과를 찾아 들어갔다. 지나면서도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아서 그 건물에 이비인후과가 있는지도 몰랐었다. 아무렴 어떠랴. 대기 시간이 없거나 짧고 알러지성 비염 약 처방만 받으면 되지.
앞에 두 명 정도의 환자가 있었고 10분 남짓 기다리고 나니 바로 내 차례가 되었다. 흰머리가 멋진 의사가 계셨다. 목과 코를 살피는 진료가 있고 나서 다른 병원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되는 방식으로 진료는 끝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흰머리가 멋진 의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알러지성 비염은 질병이 아닙니다. 증상이에요. 약으로 치료, 완치가 되는 게 아니에요.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알러지성 비염은 아무런 치료를 하지 않아도 되기도 합니다. 다만 재채기나 콧물, 가려움 등의 증상이 심하거나 코 속이 부어서 너무 힘들면 완화시키기 위해 약의 도움을 받는 것이죠.
이 말을 듣는데 중학교 때 처음으로 병원에서 내가 알러지성 비염임을 알게 되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의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음, 알러지성 비염입니다. 이건 평생 가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낫는다 이런 게 아니에요.
둘 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표현은 어쩌면 저렇게 다른지.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오늘 만난 의사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하고 그냥 이건 뭐 그냥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거야. 치료는 불가능해. 끝! 이렇게 커뮤니케이션 한 의사 때문에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는데,
오늘 만난 의사는 더불어 환절기에는 특별히 컨디션 관리가 중요하며, 찬바람을 쐬지 말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술은 마시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역시 새로울 것 없는 말임에도 앞서 들은 질병이 아니고 증상이라는 말 때문에 왜인지 고분고분한 학생처럼 아, 네 그렇죠!라고 자동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게 됐다.
그리고 약 처방은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지만 다음 주 여행도 예정되어 있고 혹시나 거기서 증상이 심해질까 봐 일단 3일 치 처방을 받아왔다. 처방전을 가지고 역시나 한 번도 방문해 본 적 없는 약국에 가서 처방전을 제출하고 약을 받았다. 약사에게 다른 약국과 다를 바 없이 약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과 먹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처방전을 준 의사와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인지, 아니면 처방해 준 약을 척 보면 아는 것인지는 몰라도 약사는 좀 전에 내가 들은 말과 거의 비슷한 말을 했다.
증상이 심하지 않으면 약은 드시지 않아도 되니 상태를 봐서 판단해서 드세요. 그리고 이 나잘스프레이는 써보셨을 테니 잘 아시겠지만 한두 번만 사용하시면 안 되고 가능한 동일한 시간대를 정해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꾸준히 사용하셔야 효과를 보실 수 있어요. 며칠 써보시고 왜 효과가 없지? 하고 슬퍼하지 마시고요.
슬퍼하지 말라니. 와, 너무 다정해. 속상해하거나 짜증내거나 답답해하지 말라고도 아니고 슬퍼하지 말라고 했어. ㅎㅎ 이러면서 혼자 막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즈음에 약사는 다음 설명을 이어갔다.
스프레이 최근에는 안 써보셨다면 방법을 잊으셨을 수도 있으니까 사용법을 알려드릴게요. 최대한 수평으로 유지하고 뿌려야 비강에 골고루 분사가 되어 효과가 좋아져요. 그렇게 하려면 자, 이렇게 발 끝을 본다고 생각하시고 좀 숙이시고 이렇게~ 뿌리시면 됩니다. 저도 알러지성 비염으로 고생하고 있어서 증상이나 힘든 부분에 많이 공감이 되어서 말씀드렸어요. 증상 완화되시고 편해지시길 바랄게요!
약국문을 나서면서, 화창한 가을 하늘처럼 마음까지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이렇게 다르게 전달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이 분들은 말로도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와 약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