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넷플릭스 다큐를 재밌게 보는 편이다. <나의 문어 선생님>도 아주 감명 깊게 봤는데, 그렇다고 해서 문어숙회나 문어요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사실이다...
육식 소비를 부추기는 문화, 비좁고 열악한 사육시설과 불결한 환경, 항생제를 섞어 만든 사료를 먹고 자라는 소, 돼지, 닭 등에 대한 이야기도 처음 들은 건 아니었다. 이런 다큐도 분명 예전에 봤었고 그 현장을 보고 끔찍함에 진저리를 쳤다. 그렇다고 해서 채식주의자가 되지도 않았고, 고깃집에 덜 간 것도 아니고, 난각번호 1번의 달걀만을 구입해서 먹지 않았다. 삶의 방식을 바꾸기에는 귀찮았고, 게을렀으며 무엇보다 피곤했다.
그런데 퇴사 후 평소보다 시간적 여유가 한결 많은 요즘 <음식이 나를 만든다>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일란성쌍둥이에게 채식, 잡식의 식단으로 8주간 식사를 하게 하고 운동이나 다른 환경적인 요인은 최대한 비슷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의 각종 신체 지표를 검사하는 내용이었다.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대로 채식 위주로 식사한 쌍둥이들이 여러 지표에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 8주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만으로 검사한 것이라 어떤 지표는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8주가 몇 배 정도 길어졌다면 결과는 또 달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다큐에서 대체식품, 채식 치즈 등에 대해서 너무 자주 나와서(특히 채식 치즈) 이게 새로운 제품 홍보인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소를 키우기 위해 나무를 베어버리고 목초지를 만들고, 불태우는 과정이나 돼지 사육 때문에 돼지 분뇨로 고통받는 이웃들(주로 저소득층 주거지)의 목소리도 들어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 때문에 축산업자가 민원에 시달려 자살하는 안타까운 뉴스도 본 기억이 있으니 비단 미국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또 우리가 건강한 식단이라 생각하고 먹는 어류 중 연어도 사실상 대부분 양식 연어이며 양식장의 환경 역시 끔찍하기로는 지상의 공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주 먹던 광어나 연어가 자연산이 아니라는 것 자체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 채 별생각 없이 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꼭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양식어류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 외 무수히 많은 가공식품들에 들어간 첨가물 범벅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그것들을 습관처럼 몸에 밀어 넣고 살아간다. 먹기 쉽고 구하기 쉬우니까. 아닌 게 아니라 밀키트 말고 뭔가 요리 같은 요리를 한 게 대체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아주 요리를 못하는 것도 아니면서.
핑계는 유일하게 하나 있었다. 너무 바쁜 회사생활! 노예처럼 항상 추가근무와 주말근무에 시달려서 일을 하지 않는 모든 시간은 좀비상태로 보냈다는 핑계가 있는데 지금은 그럴 핑계도 없으니 이때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신선식품 위주로 장을 보기로 했다. 쿠팡 멤버십도 해지했으니 로켓프레시도 이용하지 않고, 컬리도 이제 이용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동네 시장이나 마트에서 구입하면 된다.
마트에 가서 청경채, 가지, 송이버섯, 느타리버섯, 미니 당근, 미니 양배추, 생굴, 매생이를 샀다. 항상 사던 냉동식품을 사지 않았더니 냉동실도 터져나가지 않고 여유가 생겼다. 간단 요리가 편하고 좋아서 일단 굴소스 가지/청경채/버섯볶음을 해 먹었다. 매생이 떡국, 굴 떡국도 해 먹었다. 당근은 잘라서 볶아 반찬으로 만들어 먹었다. 속이 좀 안 좋았을 때는 매생이버섯죽도 끓여 먹었다. 별것도 없는 초간단 쉬운 요리뿐이지만 저 요리들 모두 태어나서 처음 해봤고 다 먹을만했다. 성공!
아직 남은 것들로는 가지를 전분물에 묻혀서 튀기듯 구워 가지덮밥 해 먹기, 남은 청경채랑 버섯은 샤부샤부로 해 먹기 정도다. 가지와 버섯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채소라서 하루에 한 번씩 먹어도 질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제 조금 익숙해지면 좀 더 다양한 채식을 즐길 수도 있을 것 같고, 생각보다 너무 간단한 요리라 혹시 나중에 다시 피곤해! 를 외치고 싶어지면 조금만 더 힘내서 만들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을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또는 소중한 은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니지 나 스스로를 자식이라고 생각한다면(나는 자식이 없지만 이렇게 상상하면 조금 더 구체적인 듯) 나에게 이렇게 가공식품과 밀키트로 거의 매 끼니를 먹이거나 외식을 주야장천 하거나 배달음식을 자주 시켜주지는 않을 게 틀림없다. 나중에 귀찮아질 때 꼭 이렇게 속삭이려고 한다.
아이한테 이렇게 먹일 건 아니지? ㅎㅎ
틀린 말은 아닌 게, 나는 나 스스로 돌보아야 하고 나의 보호자는 나니까. 보호자로서 나를 잘 돌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음식은, 나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