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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구름 Feb 16. 2024

스위트 드림(2)

 억울하고 서러운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출렁이다가 잠에서 깬다. 눈가는 축축하고 머리가 띵한데 목이 탄다. 와인을 마시고 잤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옆에 마야와 미야가 몸을 길게 뻗고 고개를 젖힌 채 꼬리를 다리 사이에 넣고 서로 기대어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마야의 앞발과 미야의 뒷발이 내 팔에 닿아 있다. 커튼을 뚫고 들어온 아침 햇빛이 방으로 스며들면서 사위가 조금씩 밝아진다. 마야와 미야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반대편 팔을 뻗어 침대 협탁 아래 놓인 생수병을 집어 들고 숨도 쉬지 않고 양껏 들이킨다. 일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더 심해지는 불면증 탓에 와인 한 잔 마시며 태블릿으로 미드 시리즈를 연속으로 보다 새벽 3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을 잔 탓인지 묘하고 기분 나쁜 꿈을 꾼 것 같다. 내가 바스러진 채 침대에 놓여 있고 낯 모르는 이들이 내 방에 들어와 집안을 살피고 나를 건드린다는 상상만으로도 치욕스러운 기분이 든다. 오장육부가 다 들어내지고 텅 빈 육체로 남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들에게 이리저리 건드려지는 꿈이라니 잠들기 전 미드의 영향을 받은 개꿈이라 쳐도 찝찝하기 그지없다. 하필 한 주의 시작을 이런 꿈에서 깨어나며 맞이해야 하다니. 잠이 덜 깬 상태로 멍하니 발끝을 바라본다. 천천히 몸을 숙여 발가락을 만져본다. 다행히, 아니 당연하게도 발은 부서지지 않는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한 시간 더 일찍 출근해서 회의를 해야 하는 월요일이다. 스마트폰을 보니 아직 알람이 울리기 30분 전이다. 잠자는 패턴을 체크하는 앱을 확인해 본다. 수면 패턴을 기록으로 남겨주는 앱을 쓴 이후로 불면의 정도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보다 수면 그래프가 더 어지럽다.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직장 생활을 한 이래로 일요일 밤에 편하게 단 잠을 잔 적이 있었던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단순한 월요병이라 여기며 몇 년 동안 불면에 시달리다가 월요일뿐 아니라 다른 요일에도 불면이 심해지면서 병원을 찾아 수면 유도제 처방을 받아서 먹기도 했지만 3개월 이상 장복하는 것은 건강에도 무리가 올 수 있어 지난달부터는 약을 먹지 않고 있다. 덕분에 알코올 섭취가 늘어났으니 건강에 무리가 오는 건 매한가지인 셈인 듯하다. 미미한 두통이 남아 머리 위쪽에서 뱅글뱅글 돌아다닌다. 곤히 잠든 마야와 미야를 번갈아가며 살짝 쓰다듬으며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날 선 긴장감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기분이다. 월요일 아침이지만 아직 30분의 여유가 있으니 잠시 여유를 누려보려 침대에 비스듬히 허리를 기대고 앉아 주말의 일을 곱씹어 본다.


 토요일은 SNS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만나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보고 맛집도 찾아가 오랜만에 들고 나온 DSLR로 음식을 찍어서 포스팅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에 들어온 이후 기분은 다운되고 말았다. 누구를 만나서 뭘 해도 그저 그때뿐, 마야와 미야만 있는 집으로 홀로 돌아오는 밤에는 늘 같은 기분이 되고 만다. 처음에는 강아지를 키웠지만 집에 혼자 오래 두는 것도 못할 짓이고 사람 손이 너무 많이 가서 결국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고양이 두 마리 마야, 미야와 함께 살게 된 지 이제 넉 달째. 화장도 지우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소파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열어 만지작거린다. 

 

 이혼서류에 도장 찍은 지 3개월 만에 14살 어린 필리핀 여자랑 재혼해서 낳은 딸을 안고 헤벌쭉 웃고 있는 전남편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본 이후로는 더 우울해졌다. 단짝 친구로 지내온 오랜 친구도 1년 정도 만나온 남자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를 하는 등 분주해진 통에 이제는 한 밤중에 우울한 기분을 수다로 풀 상대도 한 명 줄어들었다. 결혼 준비로 들뜬 내용이 메신저 프로필에도 자랑스럽게 적혀 있었다. 말을 걸어볼 대화상대를 목록에서 찾아보지만 늦은 밤에 흔쾌히 수다를 받아줄 만큼 친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저런 인간관계로 맺어진 친구 목록 중 결혼한 이들의 메신저 페이지는 온통 행복해서 죽겠다는 사진과 글이 우글거린다. 아이가 너무 예쁘다, 남편은 항상 내 편이다. 시집 식구들이 하나같이 잘해준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이야기가 차고 넘쳐서 폭발할 지경이다. 자신들의 행복을 전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뿐이다. 결혼을 안 한 싱글들은 자신의 화려한 업무처리 능력과 빼어난 외모를 뽐내는 내용의 포스팅만 가득하다. 어디서 퍼 온 시시껄렁한 심리테스트의 결과도 결국 다 자기 잘났다는 결론으로 모아진다. 남들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한껏 치장하는 이 수많은 사람들의 발버둥에 숨이 막힐 것 같아 그만 들여다본다.

 

 리모컨을 들어 TV를 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홈쇼핑 프로그램에 고정시킨다. 쇼 호스트는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내면서 지금 당장 주문하지 않으면 아주 큰 손해를 볼 것 같은 분위기로 시종일관 몰아간다. 하나같이 품질에는 자신이 있으며 문제가 있으면 무조건 반품을 해준다고 강조한다. 특별 적립금과 무이자 6개월, 한 달에 얼마만 내면 저것이 내 것이 된다는 멘트가 주술처럼 귀에 들어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결국 나는 사은품으로 보온병을 준다는 1년 치도 넘을 듯한 엄청난 양의 생리대를 주문했고, 몸에 좋다는 견과류를 먹기 좋게 소량으로 한 봉지 씩 담았다는 견과류 세트를 1+1으로 구입했다. 착화감이 끝내준다는 키 높이 굽 3cm이 숨겨진 산양가죽 앵클부츠도 품절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주문했다. 이번 시즌 마지막 세일임을 강조하는 셀렉 샵 브랜드 숄더백도 주문했다. 숄더백은 블랙으로 선택하면 가격 대비 편하게 들고 다닐 디자인이었고 사은품으로 주는 파우치와 동전 지갑이 탐났다. 

 

 소비를 종용하는 쇼 호스트의 명령에 초스피드로 주문 버튼을 누르며 순식간에 4가지 물건을 주문하니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8번 울렸다. 카드 승인을 알리는 문자와 주문 완료를 알리는 문자가 정확하게 각 4번씩 울렸다. 8번의 울림을 누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민망해서 귓가까지 얼굴이 붉어졌다. 무엇에 홀린 듯 순식간에 4가지 물건을 홈쇼핑 채널을 돌리다가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 서른다섯 이혼녀의 주말 밤이 부끄럽고 아팠다. 밖에서 마시고 들어온 술이 아직 깨지 않아 찬물을 한잔 들이 켜고 심호흡을 한다. 심호흡은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 의사가 알려준 방법이다.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생각이 많아지고 우울하고 불안함이 밀려들 때 천천히 심호흡 열 번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한 번 해보고는 이 방법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는 유용하게 쓰고 있다. 열 번의 심호흡이 끝나고 나서 전화기를 들어 홈쇼핑 사이트에 들어가 주문 취소 버튼을 누른다. 1년 동안 쓰고도 남을 엄청난 양의 생리대를 굳이 이 밤에 사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취소하고, 몸에 좋다지만 하루에 한 봉지씩 매일 몇 달을 먹기엔 질릴 것 같아서 견과류 세트를 취소한다. 상세 보기를 눌러 확대해 보니 디자인이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워서 마음에 걸리는 산양가죽 앵클부츠도 취소하고 사은품이 더 그럴싸해 보이는 데다 편하게 들기 좋아 보이는 가방도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가방 중에 비슷한 디자인이 있는 것 같아 취소해 버린다. 한차례 취소를 끝내자 또다시 스마트폰의 진동이 시작된다. 주문 취소 문자가 하나씩 도착한다. 이 네 번의 울림은 마음을 조금 안정시켜 주는 것 같다.  


‘그래, 잘했어.’  


 뜯지도 않은 박스와 심지어 똑같은 제품을 두 개나 실수로 주문하고도 반품조차 안 하고 다용도실에 처박아 둔 지난날에 비하면 참 많이 좋아졌다고 스스로에게 칭찬을 건네 본다. 하지만 집안 구석구석 쌓여 있는 잘 입지도 들지도 않는 수많은 옷과 가방, 몇 번 쓰고 방치해 둔 캡슐 커피머신,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 광파오븐, 갖가지 화장품 더미를 보면 이 칭찬은 꽤 늦은 칭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우울해진다. 무언가를 사도 그때뿐이다. 그걸 제대로 알차게 사용하면서 보람을 느껴본 적은 아득한 기억 저 너머에 희미하게 있는 듯 없는 듯했다. 

 일요일은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씻지도 먹지도 않으며 저녁까지 뒹굴 거렸다. 인터넷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시간을 때우고 스마트폰 게임의 레벨을 올리는데 몇 시간을 소모했다. 몇 분이 지나야 한 판을 할 수 있는 아이템이 채워지는 걸 기다리기 힘들어서 현질을 해서 아이템을 빵빵하게 채워 질리도록 게임을 하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다. 게임 스코어도 집중을 해야 잘 나오련만 게임하면서 머릿속은 딴생각으로 가득하니 레벨은 높은데 점수는 잘 안 나온다. 게임하면서 월요일에 뭘 입고 출근할지 생각하고, 이번 달 카드 대금을 못 막으면 카드론 얼마를 더 빌려야 하는지 계산하고, 마야와 미야 화장실 모래를 언제 주문해야 할지 생각하니 게임이 잘 될 리 만무하다. 결국 손에서 폰을 놓는다. 

 

 온종일 말할 상대라고는 마야와 미야뿐인데 고양이 두 마리에게 말을 해봤자 이따금 ‘미야오옹~’ 하는 응답이 들려올 따름이고 그나마도 이 녀석들이 귀찮으면 답이 없었다. 잘 들어보면 마야는 ‘마야오옹~’ 하고 우는 것 같고 미야는 ‘미야오옹~’ 하고 우는 것 같아서 이름을 지어 붙였는데 사실 마야가 ‘미야오옹~’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유기묘 형제인 마야와 미야는 처음부터 나를 잘 따랐다. 버려진 상처가 남아 있어서인지 순하고 말도 잘 알아듣고 물건을 어지럽히거나 실수하는 경우도 없었다. 석 달 정도 같이 지내며 조금 익숙해지니 불러도 가끔 못 들은 척하고 택배기사가 초인종을 눌러도 전처럼 호들갑스럽게 침대나 소파 밑으로 숨어들지 않게 되었다. 

 

 끼니 챙겨 먹기가 귀찮아 저녁 늦게까지 굶다가 너무 배가 고파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즉석식품을 꺼내 데워서 꾸역꾸역 입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저 허기를 달래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행위에 불과하다. 설거지감이 쌓이는 게 싫어서 1회용 용기에 담긴 즉석식품을 선호한다. 혼자 먹자고 요리를 해서 한 끼 식사를 차리는 분주함도 번거롭고 무엇보다 뭔가를 할 동력이 남아있지 않다. 가능하다면 식사는 알약 같은 걸로 해결하고 싶다. 몸에 필요한 적정 영양성분을 넣은 알약을 하루에 몇 알 삼키는 것으로 대체하고 싶다. 

 한참 굶었다가 먹은 탓인지 1인분의 반 조금 넘게 먹었는데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남은 음식물은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 처리하고 침대로 올라가 허리를 기대고 앉는다. 침대 맡에 놓인 최신 잡지를 들어서 펴 봐도 몇 페이지 넘기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광고 페이지만 한 가득이고 죄다 신상 소개, 뭘 사라는 내용뿐이다. 잡지를 밀어 두고 침대 아래에 손을 뻗어 잡히는 책을 들어 펴보지만 두어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 인문학자가 인생의 고민을 상담해 준다는 베스트셀러지만 몇 페이지만 읽어도 하품이 나온다. 남의 인생이니 그렇게들 쉽게 말하는 거지. 집중해서 읽기도 전에 반감이 든다. 읽지도 않으면서 언젠가 읽을 거라는 확신에 가득 차 인터넷 서점에서 잔뜩 사들인 책은 책꽂이에 차고도 넘쳐 방바닥까지 쏟아져 나왔다. 되는대로 쌓아놓은 책 탑이 방 안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움직이다 살짝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다. 

 

결국 태블릿을 꺼내 집어 들고 미드 시리즈 폴더를 연다. 불면이 예정된 일요일 밤의 동반자로는 미드 시리즈와 와인이 제격이다. 마트에서 할인할 때 사온 세 병에 만 원짜리 와인 한 병을 따서 와인 잔에 따르고 조각으로 개별 포장된 치즈를 몇 개 옆에 놓고 우물거린다. 눈앞에 마이애미의 해변이 펼쳐지고 살인 사건으로 드라마가 시작된다. 월요일 출근은 제쳐두고 해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어차피 내일이면 쳇바퀴 돌 듯 변함없이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 똑같은 그 자리에 앉아 똑같은 일을 똑같은 사람들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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