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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구름 Mar 29. 2024

불안한 과잉성취자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불안과 과잉이라는 것만 봐도 이미 뭔가 충분히 불안하다. 맙소사! 그런데 그게 나라고? 불안한 과잉성취자(insecure overachievers)는 자신의 존재가치만으로는 충분한 안정감을 갖지 못해 끊임없이 성취를 이루어 내고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입증받으려고 쉼 없이 노력하며 내면에는 낮은 자존감과 불안, 강박이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는 상태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게 나다.


 제발 그냥 좀 쉬어. 뭘 그렇게 하려고 해.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나를 오랜 시간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파트너가 자주 하는 말이다. 성취를 위한 사소한 어떤 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고, 그걸 못했을 때 끊임없이 자책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나를 얼마나 많이 봐왔을지 상상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런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오늘 오전이었다. 외출을 준비하는데 이미 좀 늦은 상태라 허둥지둥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맵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도착 예상 시간을 새로고침 하며 입술을 뜯고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금전적인 보상을 포기하고 자유를 얻은 지금의 상태에서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 위주로만 플래닝 한다는 것인데 지금 내 상황은 이것저것 과하게 하려들던 지난날의 내 모습과 오버랩되는 게 아닌가. 


 20년가량의 회사생활 중에 회사만 다녔던 적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된다. 항상 뭔가를 배웠고, 모임을 만들어서 활동했고, 주중과 주말의 일정표가 언제나 빼곡했다. 국내여행과 해외여행도 열심히 다녔고, 문화적 여가생활을 해도 그저 열심히 했다. 도무지 쉴 틈 없이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살아왔다. 




 타고난 기질이 가만히 있는 걸 힘들어할 만큼 부지런하고, 성취를 이룰 때 만족감을 느끼는 편이어서 그랬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보다는 그 반대편이었다. 사실은 늘어져서 뒹굴거리면서 편하게 쉬어 보고 싶지만 그래보지 못했고, 이유는 불안 때문이었다. 이렇게 놀고 있으면 안 된다는 내면의 호통이 나를 흔들어 밖으로 밀어냈다. 쉬는 것을 게으름이라고 경멸했고 그렇게 살면 도태될 것이라고 윽박지르며 겁을 주었다. 점점 거대해지는 초자아는 내면의 주인 노릇을 하며 채찍을 휘둘러댔고 엎어진 자아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반항은커녕 축 처진 어깨로 초자아가 들이미는 일정에 노예처럼 끌려다녔던 셈이다. 


 머리를 말리다 말고 컴퓨터 앞으로 와서 일정 체크를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오늘 일정 말고도 이번주에 내내 뭔가 신청하고, 대기자로 올라가 있다가 추가로 올라가는 등 여러 개의 일정을 잡아둔 게 보였다. 이걸 다 정말 원해서, 꼭 필요해서 잡은 일정이 맞아? 답은 1초 안에 나왔다. 


아니, 일단 그냥 신청했어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과도한 일정을 잡아두었을 뿐 아니라, 도서관에서 대출해 둔 책도 쌓여가고 있고,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하는 책이 늘어나는데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온라인 서점에서 관심도서로 담아두었던 장바구니도 어느새 주문을 통해 말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이건 노란불이 아니라 빨간불이 들어온 것과 같다. 멈춰, 이제 그만 멈춰! 





 난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책을 읽어보고 전문가들의 영상을 보니 답은 간단했다. 불안한 과잉성취자는 어린 시절에서 탄생한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대체로 어린 시절에 부모와 안정된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과도한 칭찬과 기대 또는 인정욕구에 중독되는 상황에 놓여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이뤄내야만 스스로의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문제가 거의 없는 아이, 부모의 말을 굉장히 잘 듣는 순종적인 아이, 부모가 정한 목표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그 목표나 기대에 부응하면서 자라난 아이일수록 커서 불안정한 과잉성취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하, 이건 뭐 100퍼센트가 아니라 120퍼센트 똑같구나. 너무 얌전하고 말을 잘 들어서 너 같은 애라면 10명도 키울 수 있겠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게 칭찬인 줄 알았는데 칭찬이 아니었다니. 아이는 아이답게 떼도 쓰기도 하고, 얄미운 짓이나 엉뚱한 짓도 하고, 이런저런 잘못도 하면서 커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너무 초기에 다 싹이 잘려나가 버려서 애어른처럼 자라나 버렸다. 초등학교 1학년때 내일 학교 갈 준비를 머리맡에 해놓고(준비물, 숙제 점검 후 책가방 싸둠, 내일 입고 갈 옷 개켜서 머리맡에 둠) 잠이 들던 나였다. 




 



이미 지나간 어린 시절을 다시 돌려서 어떻게 할 수는 없는데 그럼 앞으로 뭘 어쩌란 말인가!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앞으로의 일에 변화를 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제는 스스로의 부모가 되어 그 반대의 양육 방식으로 스스로를 돌봐줘야 한다. 자꾸 뭘 해서 이루고, 입증하려고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인지하고 브레이크를 걸어준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토닥이며 안아주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사실 어제도 오늘 해야 할 일을 미리 다이어리에 기록해 둔 바 있다. 이게 잘못된 건 아니다. 해야 할 일을 미리 찾아서 기록해 두고 일정관리를 잘하는 건 좋은 습관이다. 다만 과한지 아닌지에 대해 조금 더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하고 내가 세운 목표의 절반 또는 그 이하로 실제로 진행하도록 중재를 하는 것이 내가 나를 돌보기 위한 이제부터의 방법이 될 것 같다. 


어제 계획한 할 일에서 반값 할인 하듯이 절반으로 과감하게 뎅겅!


무언가를 더 이상 입증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그날까지 내가 나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야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네 존재 가치만으로도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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