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푹 빠져서 지내던 시기가 있었다. 동호회를 만들어서 모임을 이끌기도 했고 다른 동호회의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고 소모임까지 별도로 챙겨가며 활동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고 나서 저녁 시간에 와인 공부를 하기 위해 스터디룸을 예약하고 각자 맡은 부분의 발제를 준비해 발제 내용에 맞는 와인과 와인에 어울리는 마리아주까지 챙겨서 까만 밤을 불태우며 지냈던 때가 떠오른다.
역시, 정말 좋아서 푹 빠져서 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덜 힘들다. 주중에도 와인 모임과 번개에 나가고 주말에는 당연히 정기 모임에 나가는 등 정신없이 와인에 스며들었었다. 엑셀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 시절의 내가 집에 보관하고 있는 와인을 관리하기 위해 스스로 엑셀 시트를 열어 와인 리스트를 정리하고 메모를 했던 걸 보면 역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저자 앤디 킴(이름만 보고 남성인 줄 알았는데 책 내용을 읽어보니 여성임) 역시 그러하다. 회사에서 홀로 외국인이자 동양인이었던 저자는 4년 동안의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 와인 대학 입시를 준비하다 합격하자(무려 장학금을 받음) 회사를 그만둔다. 초, 중, 고 시절 이른 시간에 일어나 학교에 가는 것을 적응하기 힘들어했던 아침잠 많은 저자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억지로 출근을 하고 지켜야 할 규율을 지키며 생활하며 그런 삶에 더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고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용기를 냈다.
저자가 와인 대학을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는 것(면접 당시 면접 자리를 마케팅 실전 자리처럼 세팅해서 참여했다고 하니 아이디어와 실천력이 대단)에서 시작해 와인 업계 꼬꼬마로 와인 시음과 판매 일, 제조 공정을 직접 확인하고 체험하는 일을 지나 와이너리에서 한몫을 하는 직원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한 편의 성장 드라마처럼 재미있게 펼쳐져 있다. 특히 웃음이 절로 났던 대목은 와이너리에 출근할 당시 제일 먼저 출근해서 아직 안개가 가시지 않은 와이너리를 보는 게 즐거웠다고 한 대목이다.
아니, 아침잠이 많으시다면서요 작가님. 아침에 학교 가는 거랑 출근하는 게 힘드셨다면서요. 그런데 프랑스 와이너리에 취직해서는 제일 먼저 출근하는 직원이 되어 아직 걷히지 않은 안개를 보고 계시는데 그럼에도 참 행복해 보이네요.
프랑스의 문화와 한국의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여러 가지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면서 와인 산업 종사자로 역량을 발휘해 나가던 저자는 어느 날 드디어 와인 전문가들에게 인정을 받아 와인 기사 훈장을 받게 된다. 와인 대학 합격 통보를 받고 난 지 6년 뒤의 일이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여전히 자신이 병입 된 와인이라기보다는 양조통에 남아 다음 단계의 숙성을 기다리는 상태이고 싶다고 한다. 아직 맛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상태의 와인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고 여전히 재미있는 와인 일을 계속하며 공부를 꾸준히 해나가겠다는 말로 책을 맺는다.
흔히들 알고 있지만 실천이 어려운 일, 재미를 느끼는 일이며 좋아하는 일 나아가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아, 오늘은 오래간만에 와인 한 병을 따지 않을 수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