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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구름 May 22. 2024

상담 6회기 후기(1)

방어기제


 어느새 절반을 넘어 10회의 심리상담 중 6회 차가 되었다. 지난번에 조금 이야기하다가 끝나버린 듯하여 이번에는 제대로 이야기하리라 마음먹고 상담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폭포수처럼 이야기를 쏟아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오랜 불화, 어린 시절 유기불안에 시달린 이야기, 경제적으로 풍족했다가 급격히 악화되어 고생했던 이야기, 오빠가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다가 스스로 생을 마친 이야기, 아버지 장례 후 어머니의 자해와 언어폭력에 시달려 인연을 끊게 된 이야기 등 장장 30분 동안 혼자서 이야기를 했는데, 상담가의 개입으로 잠시 이야기가 중지되었다. 사실 내가 이야기를 끝도 없이 계속하는 동안 상담가는 어느 시점 이후에는 딴짓(상담 관련 서류 넘겨보기)을 하기도 하고 지루한 표정을 짓거나 대화를 끊고 들어오려는 바디 랭귀지를 조금씩 했지만 나는 그런 신호들을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상담가는 이런 나의 모습도 의미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며 말을 꺼냈다. 상담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대화인데 이렇게 상대방의 제스처를 읽지 않거나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런 방식으로 쏟아내듯 상황 에피소드를 설명하는 것이 원하는 바라면 그렇게 할 수는 있으나 그럴 경우 대화의 적절한 주고받음으로 기대할 수 있는 피드백을 받는 게 어려워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 모든 사인을 무시하고 속사포처럼 빠른 랩을 하듯이 말을 거의 토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상담가가 내 대화를 못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치 불타는 구두를 신고 춤추는 마녀처럼 미친 듯이 발 대신 혀를 놀린 셈이었다.


 내가 다니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보통 한 환자당 20분을 잡는다. 그 진료 시간 안에 끝날 때고 있고 5~15분 정도 길어질 때도 있는데 거의 대부분 시간을 초과하고 그러면서도 항상 시간이 너무 짧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30분 이상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이유가 심리상담을 신청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할 정도로 나는 내가 말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50분이 주어진 심리상담에서 드디어 내가 뒷사람 예약 시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상담가의 제스처를 모두 무시한 채 30분이 넘도록 혼자 그간 갈망했던 이야기 토해내기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상담가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신도 30분까지는 말을 끊지 않고 제스처 정도로만 신호를 주고 계속 말할 수 있게 두었다고 했다.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마치 나를 제삼자로 둔 관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고 에피소드와 상세설명은 있으나 그 안에 나의 감정을 드러내는 단어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있다고 해도 2차적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인 분노와 짜증 두 가지뿐이었고 그마저도 30분 내내 한 이야기 중 딱 3번 나왔다고 했다. 오, 맙소사. 그렇구나! 나는 상황설명만 30분을 했던 것이구나.




 맞다. 그게 나의 방어기제였다. 내 일을 남 일처럼 다뤄버리는 것. 부정적인 감정은 최대한 깊이 묻어 감춰두고 그게 알아서 썩어 문드러져서 애초에 어떤 감정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될 때까지 푹 삭혀버리고나서 그 위에 자꾸만 새 흙을 덮고 또 덮었다. 그러니 내 감정은 스스로도 점점 더 알리가 없었다. 정체를 확인하려고 보면 이미 형체를 잃고 다른 것들과 범벅이 되어 엉켜 있어서 그것들의 총합에 대한 감정(분노, 짜증)만 겨우 알아챌 수 있고 원감정을 알기에는 이미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셈이었다.


 심각한 표정의 상담가가 나에게 질문했다.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오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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