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쓴 산문을 읽으면 조금은 복잡한 감정이 생겨난다. 시를 쓰는 사람이 산문까지 잘 쓰면 어쩌란 말이냐 하는 얼토당토않은 어깃장도 있고, 아 역시 시인이 쓰는 산문은 뭔가 다르구나 하는 경탄도 있다. 그러려면 일단 시인의 시부터 읽은 후에 산문을 읽어야 할 것 같은데 김상미 시인의 산문 <달콤한 빙산>을 읽기 전에 김상미 시인의 시를 읽지는 못했으니 그저 시인의 산문이라는 정보 하나만 갖고 읽었다. <달콤한 빙산>은 세계일보에 김상미의 감성 엽서로 연재되던 칼럼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따로 한글을 배우지 않아도 언니 오빠 교과서나 숙제를 곁눈질로 보고서 스스로 한글을 익힐 만큼 똑똑하고 글씨도 잘 써서 학급에서 도맡아서 글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담당하던 김상미 시인은 가난한 집안 환경, 아마도 동생들(남동생들이었을 듯)의 대학 진학을 위한 희생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서른한 살까지 고향에서 지내다가 그 후에 서울로 올라와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60년이 넘는 시간을 홀로 지내며 가진 집 한 채 없이 여전히 서울에서 시는 가끔 쓰고(시력에 비해 시집이 너무 조촐하다고), 그림책 수업을 하고, 도서관에서 오래도록 그림책을 보는 것을 즐기며 살아가는 시인의 이야기가 담긴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조용한 찻집에서 잘 우려낸 녹차 한 잔 앞에 두고 시인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듣는 것 같은 기분이다.
책 제목이 왜 달콤한 빙산일까 첫 페이지를 읽으면서부터 궁금했는데 후반부쯤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배가 느린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 영혼은 빈 공간에 떠 있는 달콤한 빙산 같아 보였다고 한 괴테의 시구절에서 따온 말이었다. 그리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그냥 달콤한 빙산처럼 서서히 녹으며, 아직 걸어보지 못한 좁고 넓은 길, 들어가 보지 못한 집, 열지 못한 크고 작은 창문들, 마셔보지 않은 시냇물들을 주변 사람들과 기꺼이, 즐겁게 맛보며 살자고.
이제는 서서히 녹아버리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조금은 알 듯하다. 자신 외에는 누구에게도 맞서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무언가 맞서는 그 극적인 순간은 너무도 짧아서 자신도 모르는 새에 다시 구태의연한 덫에 빠져버린 자신을 보게 되지 않던가, 실패한 개혁의 악순환처럼. 그럴 바엔 차라리 달콤한 빙산이 되어 행복하게 녹아내리고 싶다. 그 속에 담긴 부정과 순응의 듯은 다 지우고, 서서히 소멸하는 달콤새콤함처럼.'
그런데 저 문장의 달콤새콤함처럼은 어쩌면 달콤새콤처럼이 아닐까? 우리의 삶은 서서히 소멸하는 달콤새콤 같지 않은가. 적어도 내겐 그렇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