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

by 보라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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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을 주로 써온 히라노 게이치로의 10년 만의 작품, 단편집이다.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인 그는 어느새 세월이 흘러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단편집이라서 선물세트를 받은 기분으로 수록된 단편을 하나씩 설레는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5편의 단편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아무래도 표제작인 <후지산>이다. <후지산>은 주인공 가나, 주인공이 앱으로 만나 결혼을 전제로 데이트를 하는 사이인 쓰야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둘은 서로 관계가 진전이 되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만남을 지속하던 중 같이 여행을 가게 된다. 여행을 하다가 가나가 건너편 기차에서 어떤 10대 소녀가 손으로 구조 신호를 보낸 것을 보고 급히 도움을 주기 위해 기차에서 내리고자 하는데, 이런 가나와 뜻을 같이 하여 내리지 않고 그냥 자리에 앉아 있던 쓰야마와 결국 틀어지게 된다. 가나는 우여곡절 끝에 10대 소녀를 구하고 성폭행이 벌어지지 않게 막게 되며, 이 사건은 뉴스에도 나온다. 이후 가나는 쓰야마의 윤리관(윤리 결여)에 대해 실망하고 더 이상 만남을 갖지 않기로 결심하고 헤어진다.



그러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시점, 도쿄 지하철에서 묻지 마 칼부림 사건이 벌어져서 한바탕 난리가 난다. 뉴스로 사건을 접한 가나는 가해자(용의자)와 피해자 이름을 혼동하여 쓰야마가 가해자인 줄로 오해했다가 다시 사실을 확인하고 충격에 빠진다. 쓰야마는 사건이 벌어진 상황에서 초등학생 아이 둘을 보호하기 위해 몸으로 막다가 사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묻지 마 살인 사건과 같은 끔찍하고 안타까운 일이 일본에서 여러 차례 발생하여 뉴스에서 접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뉴스를 봤지만 과거에는 확실히 일본에서 더 많이 발생했던 것 같다. <후지산>에서 다루는 도쿄 지하철 내 묻지 마 살인 사건은 어느 사건을 다룬 것인지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2023년, 2021년 도쿄 지하철 사건과 2018년 신칸센 살인 사건을 섞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2018년 신칸센 살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일본 시즈오카를 홀로 여행중이었다. 어느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먹다가 가게에 놓인 TV에서 속보로 나오는 뉴스를 보았고 너무 충격을 받아 어쩔 줄 몰라 했다. 포장마차 사장님 내외와 가게에 있던 중년 아저씨 두 분이 나를 안심시켜 주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2018년 신칸센 살인 사건에서 한 30대 남성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20대 여성 둘을 구하기 위해 몸으로 막다가 60차례 찔려 숨진 안타까운 일이 있었기에 나는 이 소설 속 사건 묘사를 보자마자 그날의 사건을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윤리관에 실망하여 이별을 선택했던 가나, 그렇지만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 숨진 쓰야마. 가나는 자책하고 죄책감,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으로 힘들어하면서 그와 함께 떠났던 여행길을 홀로 다시 오른다. 나머지 다섯 편의 단편까지 포함해서 생각한다면 결국 선택에 대한 질문을 남기는 이야기다. 그때 소녀를 구하고 다시 돌아와 같이 여행을 했다면 쓰야마는 이렇게 죽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 같은 것.



나는 다가오지 않은 불행에 대해서는 미리 겁을 먹는 타입이면서도 지난 일에 대해서 그렇게 했더라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같은 가정을 하면서 괴로워하는 편은 아니라 이런 방식에는 몰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네 편의 단편이 선택에 대한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는 편이라 오히려 표제작에 이끌렸던 것 같다. 후지산의 정면은 어디서 본 것이 정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장이 더 오래 남는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어떤 부분을 보고 내린 것이며 그게 정면으로 그 상대를 마주하고 내린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 같아서.



나머지 단편 <이부키>, <거울과 자화상>, <손재주가 좋아>, <스트레스 릴레이> 중에서는 <거울과 자화상>이 인상적이었다. 이 단편에는 주인공이 절망적인 인생에 진저리 치며 국가로부터 사형을 당하고 싶어서 신주구 구청에 찾아가 면담을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소설적 표현이라지만 3인 이상을 살인해야 사형을 당할 수 있다는 구청 직원의 기계적인 답변이 조소를 불러온다. 일본은 2024년에도 사형을 집행한 바 있는, 사형집행 국가다 보니 이런 설정은 단순히 비유라고 할 수는 없다. 기사를 찾아보니 전철에서 묻지 마 살인을 저지른 범인 중 한 명도 2명 이상 죽이면 사형당할 것 같아서 그랬다는 이야기를 인터뷰에서도 한 바 있으니 아마 이 점도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닐까 싶다.



살인, 사형 이런 단어만 자주 사용해서 모든 단편이 다 어두운 것 같이 느껴질 수 있지만 나머지 3편은 그렇게 어두운 내용은 아니다. 다만 실제 벌어진 사건을 인용한 것 같은 이야기이고 내 개인적인 경험과도 결부되어서 해당 단편에 더 끌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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