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의 배틀

소모적인 행위의 반복

by 보라구름

통증의학과 진료를 받으러 가기 전 시간 여유가 생겨 오래간만에 서점에 들러 매대를 훑어봤다. 이런 책들이 잘 팔리는구나. 오, 이런 책이 나왔네? 어, 이 책은 아직도 잘 나가다니 대체 몇 쇄야? 판권면을 넘겨 확인해보다 엄청난 재쇄의 숫자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며 여기저기 열심히 돌아다녔다.


서점에 오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타인과의 배틀인걸 알면서도 영 지켜지지 않는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던 나, 그 해에 유독 등단한 동기들이 많았던 학번. 같이 수업을 들었고, 몇몇 추억을 쌓았던 선배, 기자로 일하면서 맺은 인연 중 당시엔 같이 기자였으나 이제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방송인이 된 사람, 그 밖에 사회에서 맺은 인연의 사람이 이제는 작가가 되어 낸 책 등 얕은 인연의 줄을 댄 타인들의 책이 곳곳에 놓여 있고 꽤 잘 팔리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오토매틱으로 재생이 된다.


야, 넌 지금 뭐 하고 있냐. 언제까지 서점에 나와 이 사람들 책 뒤집어 판권 훑어보며 얼마나 찍었나 확인하고,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이따위 내용이 이렇게 잘 팔리는 이유가 뭐냐고 속으로 독설을 뱉을 거냐. 지질하다.
넌 이 사람들이 이렇게 될 동안 뭘 한 거냐. 한심해, 쓰레기. 실패자. 넌 지금까지도 해낸 게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야. 이렇게 서점에 와서 책이나 들춰보고 살아라. 축하한다며 책 사서 인증하고 속으로는 꾸역꾸역 신세한탄이나 하며 살아라.


꽤 많은 사람들에게 소설을 쓰겠다고, 드라마 대본을 쓰겠다고 말하며 살아왔다. 소설 창작 수업과 드라마 대본 쓰기 수업에서 작품을 써서 합평도 했다. 그런데 드라마 대본을 쓰면 소설 같다고 하고, 소설을 쓰면 드라마 같다는 평을 들었다. 소설을 드라마처럼 쓰고 드라마를 소설처럼 쓰면 망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썼다는 이야기다. 아, 그래? 난 안 되는 건가. 절대적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나의 작품을 면밀히 읽고 그런 평을 내린 것도 아니고 합평에서 들은 몇 가지 이야기일 뿐인데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낙인찍어버렸다. 망할 재주를 가졌고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설령, 그 말을 다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럼 나는 소설을 드라마처럼 쓰는 망할 재주와 드라마를 소설처럼 쓰는 망할 재주를 신묘하게 다 가진 자니 그 재주를 제대로 된 장르에서 펼치도록 연습하면 될 거 아냐하고 노력을 했어도 될 일 아니었나 싶지만 말이다.


언제나처럼 서점 마실은 그렇게 쓸쓸한 뒷맛을 남기고 끝났다. 최근에 독립출판물 중 우울과 불안에 대해 다룬 책을 몇 권 사서 읽었는데 아예 모르는 사람들의 글은 오히려 위로가 되고 비교 배틀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나는 이렇게까지 나를 공개하는 글은 쓸 용기가 없다는 똑같은 결론만 내리고 말았다.


비교가 불행의 시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비교가 시작되는 사회다. 이제는 결혼, 출산의 배틀에서 제법 멀어진 나이가 되어 그 비교 지옥은 벗어났지만 남들이 다 한다는 그 시기에 해당하는 나이에는 그 비교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나이까지 누구를 만나지 못하면 난 평생 혼자 외롭게 살다 비참하게 늙어 가거나 이상한 사람한테 걸려 얼마 있지도 않은 가진 것도 다 탈탈 털리겠지 하는 불안감. 이때 결혼을 하지 못하면 아이는 영영 못 낳게 되겠지. 안 낳는 것과 못 낳는 것은 다른 거 아니야? 애도 못 낳는 게 되는 거야. 이런 목소리들이 주야장천 나를 괴롭혔다. 안팎에서 골고루.


독신으로 평생을 살아도 비참하고 외롭기는커녕 잘 사는 사람들도 있고, 결혼해서 애를 안 낳든 못 낳든 간에 아이 없이도 부부로서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누가 좀 큰 목소리로 알려줬더라면 공포가 덜했을까? 아니 스스로 발견하고 알기 전까지는 공포에 떨어야 했을 것 같다.


여전히 나에게는 버려지는 것, 혼자 남는 것, 고립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크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잦은 불화 때문에 늘 집안이 시끄러웠고 그러다 큰 고비가 올 때마다 난 앞으로 고아원에 가게 되는 걸까, 부모님이 이혼하면 나는 어느 쪽을 선택해서 산다고 법정에서 말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했던 게 이렇게까지 나에게 오래도록 남아 흔들 줄은 정말 짐작도 못했다.


애어른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어린 시절에 손이 덜 가는 아이, 야무지게 자기 일을 잘 하는 아이로 컸던 까닭도 내 성정이 그래서가 아니라 그래야 버림받지 않을 거라는 불안 때문이었다는 것도 아주 한참 후에야 알게 된 일이다. 타인과의 배틀을 끊임없이 해대는 이유도 어쩌면 남들과 비교해서 꿇리지 않아야만 버려지지 않을 거라는 무의식에 지배 당해서일 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에게도 버려졌던 시기가 길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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