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변수가 안겨준 행운, 깜짝 생일파티

걷고 쓰고 그리는, 산책 드로잉 에세이(6)

by 안이다

“칠갑산 산마루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어느 멤버의 재치있는 농담에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이번 4월 출사지는 칠갑산이 가까이 있는 충남 청양군. 다음 촬영장소로 이동할 때마다 도로 표지판에 칠갑산으로 가는 방향 표시가 보였고, 어느새 너도나도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소리가 어린 가슴을 태웠소”라는 옛노래 구절을 떠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날 출사일은 일교차가 크긴 했지만, 낮 동안은 햇볕이 따사롭고 하늘은 푸르른, 그야말로 봄 날씨다운 날이었다. 봄꽃을 구경하러 나온 상춘객들과 한식을 맞은 성묘객들이 도로에 쏟아져 나온 주말이었기에, 대부분의 멤버들이 약속 시각보다 한참 늦게 도착했다. 그 때문에 그날의 첫 일정인 청양 오일장 촬영은 간단하게 스케치 정도로 하거나 아예 하지도 못한 멤버도 더러 있었다.


여행 나들이에는 언제나 변수가 따라붙는 법. 조금씩 어긋나고 틀어진 계획이나 일정들이 쌓이고 쌓이면 애초에 구상했던 여행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지기도 한다. 여행의 변수와 우연의 힘은 너무나 막강해서 우리로 하여금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여행, 혹은 평생 잊지 못할 선물 같은 최고의 여행을 경험하게 만든다.


그날 출사일은,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하나하나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변수와 우연의 힘에 영향을 받았다. 평소 무슨 일을 하든 세세하게 계획과 일정을 먼저 잡고 해나가는 편이라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면 호기심보다는 혼란을 크게 느끼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 출사에 가미된 자잘한 변수와 우연들 덕분에 작은 모험, 생활의 활력을 건네받은 기분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3년째 지속되다 보니까, 몸과 마음이 잔뜩 움츠러 든 채로 일상의 작은 쳇바퀴 안에서 돌고 도는 답답함이 컸던 상황이었는데, 조만간 예전과 같은 자유와 활력 넘치는 생활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청양 오일장에서는, 시장 바닥을 가벼운 걸음으로 통통 뛰어다니는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노란 티셔츠를 입은 푸들 강아지를 따라다니며 카메라에 담느라 유쾌했다. 다음 출사지는 국내 최대 식물원으로 유명한 고운식물원. 환하게 꽃망울을 터트린 수많은 봄꽃과 봄내음을 바로 앞에서 마주할 수 있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싱그러움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제법 당황할 일이 있었다. 식물원 정상에서 입구로 되돌아갈 때는 롤러슬라이드를 타고 가기로 되어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놀이동산에 간지도 너무 오래됐고, 예전에도 놀이농산에 가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극도의 공포감을 견디는 게 싫어서 웬만해선 놀이기구를 타지 않았다. 그런데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트 같은 것을 타야 하다니 내심 어이가 없었다. 너무 송구하지만 저는 그냥 걸어서 내려가겠다고 말을 하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다른 분들은 이미 롤러 슬라이드를 타고 와하하! 유쾌한 탄성을 지르며 출발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누군가가 내가 탈 놀이기구 비용까지 내준 상황이었고,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그걸 타고 웃음꽃을 터트리는 상황에서 저는 무서워서 못 타겠어요, 라고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쿵쾅대는 심장을 다독이며 방석을 엉덩이에 깔고 앉아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롤러슬라이드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웬만한 공포는 머릿속에서 더 큰 법이고, 실제로 상황과 마주하면 크기가 주는 법인가 보다. 처음에만 무섭고 내려가면 갈수록 오래전에 몸이 기억하던 짜릿한 스릴감이 되살아나서, 어느새 나도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며 미끄럼틀 타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의 서프라이즈 이벤트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지막 일정은 방기옥 고택을 방문하는 거였는데, 누군가가 통일신라 때 세워진 천년고찰인 무량사가 거기서 멀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언제 다시 여길 올지 모르므로, 내친김에 거기도 가보자고 대부분 멤버가 의기투합했다.


우리가 무량사에 도착했을 때는 일몰이 시작되어 햇빛이 부드러워지고 사물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고혹적으로 보이는 시각이었다. 세월의 비바람을 맞으며 멋드러지게 풍화되어가는 목조건축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절 인근 마당의 꽃다지밭을 촬영하고 무량사 입구로 돌아왔더니 같이 다녔던 멤버들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을 찾다 보니까, 무량사에 도착했을 때 그 앞의 가게에서 몇몇 사람들이 표고버섯을 샀었는데 그 가게 안에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유리창 너머 가게 안 풍경을 언뜻 살펴봤더니 사람들이 둘러앉은 테이블 위에는 초가 꽂힌 케이크가 올려져 있었다. 알고 보니까, 그날이 가게 사장님의 생일이었고, 사장님이 우리와 케이크를 나눠 먹고 싶다고 하셔서 다들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깜짝 생일축하 파티를 하던 상황이었다. 나도 뒤늦게 그분의 생일축하에 동참했다. 우리 멤버 중 누군가는 멋지게 축하 노래를 불러드렸고, 사장님은 즉석에서 무친 산나물과 막걸리를 내어왔다. 저녁도 지어주시겠다고 해서 이런 게 푸근한 시골인심인가, 내심 깜짝 놀라고 크게 감동했다. 그때 사장님과 우리는 서로 알게 된 지 30분도 채 되지 않는 낯선 사이였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 인연이 있다면, 대체 무슨 인연이었기에 만나자마자 생일축하를 주고받는 사이인지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웠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타인과는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격리와 분리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낯선 이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시간이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웠는지, 그날 생일축하를 하는 순간 깨달으며 몇 번이나 울컥해졌다. 평소 나란 사람은 혼자서도 지내고, 낯가림이 있어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다고 말해왔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는 거였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얼마나 좋고 행복하고 소중하고 가슴 벅찬 일인지 그때 되새길 수 있었다.


뜻밖의 시간에, 낯선 장소에서, 처음 만나는 이와의 어울림. 그렇게 세 가지 조합은 우리가 여행에서 만날 수 있는 최대의 변수이자,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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