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와 우울

- 걷고 쓰고 그리는, 산책 드로잉 에세이(8)

by 안이다

“걷기 가장 좋은 때는, 해가 떠오를 즈음에 아침 해의 기운을 받으며 걷는 거예요. 그렇게 보름만 해봐요. 우울한 기운이 싹 가실 겁니다.”


밤 10시 다 되어가는 홍대 앞 거리가 짙은 어두움에 잠기고 있었다. 여느 때 홍대 앞이라면 번쩍이는 카페와 술집과 옷가게의 간판 불빛으로 낮처럼 환했겠지만, 코로나 방역지침으로 대부분 점포가 문을 닫았거나 셔터 내릴 준비 중이어서 어딜 가도 어두컴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에너지 넘치는 젊음의 거리도, 나만큼이나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예정됐던 일을 끝내고 지하철 가는 방향의 골목길을 걷는데, 딱 한 군데 가게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게 보였다. 호기심에 이끌려 그곳으로 다가섰더니 타로가게였고, 어느새 나는 그곳에서 내 고민이 담긴 카드를 펼쳐놓고 있었다.


은은한 미색의 한복을 차려입은 60대 장년의 타로술사는, 내가 뽑은 카드마다 우울한 기운이 뚝뚝 묻어난다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방금 말했던 대로, 이럴 때 자신은 아침에 해가 뜨면 무작정 걸었고 그러면 많이 나아진다고 조언했다.


그즈음 무엇에도 마음의 에너지를 낼 수가 없었다. 죽고 싶다거나 잘 살고 싶다거나 하는, 부정이든 긍정이든 어느 삶의 방향으로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빛이 하나도 들지 않아 사방에 곰팡이가 가득한 지하방에, 무겁고 축축한 이불을 덮고서 수개월째 내내 누워있는 기분이었다. 재작년엔 엄마를, 작년엔 반려견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면서 아무래도 심리적인 타격이 클 수밖에 없겠다 싶었지만,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려면 아무리 사소한 일을 보려고 해도 조금씩의 의욕이든 기운이든 필요한 법인데, 그런 게 가슴에서 다 꺼져버린 듯한 막막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타로술사의 조언을 들은 다음 날은 비가 와서 바깥에 나가지 못했고, 조언의 효용성을 반신반의하는 마음은 그 말을 잊어버리게 했다. 그러고 일주일이 지나고 홍대 앞에 갈 일이 또 생기고 나서야 조언을 떠올리게 됐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어쨌든 햇볕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안양천으로 걸으러 나갔다. 너무 오랜만에 햇볕 아래 걸어서인지 마치 유령이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몸의 감각이 내 것이 아닌 듯 어색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언젠가 친구들이 했던 걷기에 관한 말들도 떠올랐다. 우울증에 걷는 게 좋다고들 해서 매일매일 몇 시간씩 걸었더니 힘만 들고 무릎이 탈 났다, 발바닥에 염증이 생겨서 병원에 다니게 됐다, 걷는 거랑 우울한 거랑 별 상관없더라는 푸념들이 떠오르며 그만 포기하고 싶어졌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한 시간은 걸을 줄 알았는데, 20분도 되지 않아서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평소에 가지 않았던 샛길로 들어섰다. 안양천에서 집으로 가는 평소의 루트는 모서리가 있는 직선의 연결인데, 빨리 돌아가고픈 마음에 대각선 루트를 시도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골목은 또 다른 골목을 만나서 굽이굽이 돌고 도는 길목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나는 어느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서 오래된 골목 안의 집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고,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던 중이란 사실을 까맣게 잊고, 더 멋진 골목길 풍경을 찾아서 이리저리 발길을 돌리고 카메라 화각을 바꿔보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현재 삶의 에너지가 바닥났다는 우울한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였다. 조만간 여기 골목길 풍경을 그림으로 담아야지 하는 다짐에 마음이 들뜨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때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자기라는 건 심연의 검은 우물 같아서 그 안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면 우물에 빨려 들어가 결국 빠져 죽게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직도 걷기가 우울감 완화에 내게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바깥으로 나와서 걸으면 나 아닌 세상을 만나게 된다. 자기 안으로만 흐르는 시선의 방향이 바깥의 사물이나 풍경으로 흐른다는 건, 생각이나 마음이 자기 안에서만 고이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건 확실하니까.


20220218.jpg <우리동네 골목길>, 오일파스텔, 8절,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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