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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에르쥬 Jul 19. 2024

눈물의 집사를 달래주는 건 결국 고양이로다

별고나 2024년 7월 19일 금요일


막둥이 고양이 뀨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어느 덧 4개월이 훌쩍 지났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나의 죄책감과 상실감은 전혀 덜어지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무게감이 더욱더 크게 느껴진다. 일반적인 고양이와 달리 시각, 청각, 촉각 등 오감을 총동원해 온몸으로 애교를 표현해 주던 별난 아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뀨의 활기찬 모습과 유별나게 큰 목소리 그리고 뜨거운 온기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고양이 밥을 주거나 화장실을 치울 때도 생각이 나고 뚱이와 삐쥬의 얼굴을 볼 때도 생각이 난다. 뭔가 일상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집 밖에 종종 나가기도 하는데 집에 들어오면 더 큰 슬픔이 찾아온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격렬하게 반겨주던 애착 고양이의 빈자리는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고양이 3남매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아이컨택을 하는 게 일종의 루틴이었는데 이제는 그걸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신체 일부분이 무참히 잘려나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야외에서는 최대한 가면을 쓰고 감추고 있지만 홀로 집안에 있을 때는 그야말로 눈물의 집사가 된다. 2024년 3월 9일 토요일 이후 단 하루도 오열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는 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도 든다.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리면 피눈물이 날 수 있다는 속설도 있는데 처절함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장치이기에 실핏줄이 터지지 않는 이상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에 오열할 때는 그야말로 목이 터질 정도로 한스러움을 표현했는데 너무나도 미련한 짓이었다. 이틀도 지나지 않아 목이 잠겨버렸고 지독한 감기몸살이 찾아왔다. 인간의 신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목 놓아 우는 건 할 수 없도록 설계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는 오열하는 것도 노하우(?)가 생기면서 눈물의 집사 역시 진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간은 진화의 동물이라는 표현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남아 있는 고양이들에게 최대한 영향을 주지 않도록 오열을 최대한 절제하려고 하지만 순간적으로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다. 이렇게 되면 고양이들도 결국 눈치를 보게 되고 물리적으로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하게 되는데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인지하게 된다. 뀨를 일찍 보낸 건 결국 나의 무지와 경솔함 때문인데 애꿎은 고양이들이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악순환이 계속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9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발라드 가수 신승훈의 노래 가사처럼, 김소월 시인의 대표작 진달래꽃의 내용처럼 속으로는 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퍼하지 않는다는 애이불비의 자세로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초월적인 가수 김정호의 하얀나비 가사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인데 초월적인 사상 전환은 인간의 본능을 벗어난 부분이기 때문에 도달하기 힘든 경지인 것 같다.

뀨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후 굳게 닫아 놓았던 침실의 방문을 이제는 활짝 열어 놓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뀨가 꿈에서라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남은 고양이들이 자유롭게 올 수 있게 함으로써 혹시나 몸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는지 지속적으로 컨디션 체크를 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나의 간절함이 덜한 것일까? 아니면 뀨가 원하지 않았던 것일까? 무지개다리를 건넌 이후 한 번도 뀨가 꿈에 나온 적은 없다. 부디 뀨가 햐얀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서 극락왕생했기만을 간절히 기원할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별이 된 고양이를 그리워하는 눈물의 집사를 달래주는 건 결국 고양이다. 집사가 침대에 누울 때마다 뚱이가 베개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있다. 어렸을 때 나를 피하던 소심한 고양이가 스스럼없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며 위안을 받으면서 잠을 청한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뚱이는 옆에서 곤히 자고 있거나 아니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이렇게 교감을 하다 보면 항상 나를 바라보고 꾹꾹이를 하던 뀨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오버랩되기도 하지만 둘은 분명 다른 존재다. 뀨를 허망하게 보냈을 때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법칙이나 공식 같은 건 없는 게 인생사인듯 싶다. 그냥 그렇게 순응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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