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고나 2024년 8월 2일 금요일
지난 3월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던 고양이 뀨의 모습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다. 뀨는 여러 가지 종이 섞였는데 아버지 고양이는 스코티시폴드와 먼치킨이 섞여 있었고 어머니 고양이는 노르웨이 숲이었다. 뀨는 모든 종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노르웨이 숲의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지만 1살이 지나니 장모종의 모습을 하게 되었고 마치 사자와 같은 멋진 갈기를 갖게 되었다. 팔다리가 길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원숭이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산책냥이였던 아버지 고양이의 모습과 타고난 붙임성을 생각했을 때 충분히 산책냥이가 되었을 거라고 여겨진다. 혹시나 산책하다가 해를 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되어서 다른 고양이와 달리 산책을 아예 시도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는 많이 후회된다.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전에 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줬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아마 뀨가 살아 있었다면 털을 밀어주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4년째까지는 미용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 작년에 어머니와 함께 셀프 미용을 했다. 털을 미는 것 자체가 낯선 일이기 때문에 하악질을 하면서 싫어했지만 털을 밀고 난 후에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는 모습을 보니 참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특유의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눈을 깜빡거리며 반가운 소리를 내면서 내 몸에 올라타던 그 아이는 이 세상에 없다. 수많은 선택이 겹쳐 결국 이와 같은 사달이 난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의 죄책감은 더욱더 커지게 되고 내 마음은 견디기 힘든 정도의 상실감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제는 확실히 알 거 같다.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죄책감은 죽을 때까지 따라온다.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고통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억지로 극복하려고 하면 부러지기에 그 고통 속에서 견디고 견뎌야 한다. 극단적인 선택은 결국 고통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견디다 보면 천천히 회복될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회복까지는 요원해 보이지만 언젠가는 그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던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세상 충만한 행복을 선사해 줬던 우리 뀨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만이 별이 되어 버린 애착 고양이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죄책감이 너무 심해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