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에르쥬 Aug 09. 2024

고양이의 천성과 습성... 뀨가 각별했던 이유

별고나 2024년 8월 9일 금요일

최근 디즈니플러스에 올라온 삼식이 삼촌을 몰아서 봤다. 대한민국의 격동기인 1960년대 제1공화국을 다룬 시대극인데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전개 구조로 인해 몰입하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기억에 계속 남는 대사가 있다. 극 중 박두칠 역을 맡은 송강호 씨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두 가지는 타고난 천성과 살아온 관성'이라는 얘기를 한 게 바로 그것이다. 천성은 말 그대로 타고난 것이고 바뀌지 않는 걸 의미한다. 관성은 살아가면서 만들어 가는 것인데 마치 중력에 끌리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향하게 되는 것인데 천성이 결국 관성이 되고 신념화가 된다는 얘기였다. 크게 보면 동감을 하는 부분이지만 습성이라는 부분을 간과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습관처럼 계속 행하다 보면 그게 본능적인 부분이 더해져 습성이 되는 것이고 이게 관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필자는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천성과 습성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흔히 고양이는 까다롭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개에 비해서 고양이가 사람을 가린다고 알려졌는데 남의 집에 가서 고양이들에게 격렬하게 환영받으면 마치 모종의 시험을 통과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다. 좋은 사람이라는 걸 고양이에게 인정받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사람을 무조건 반겨주는 사교성 만점의 고양이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니 천성이라는 걸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3월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뀨는 처음 집에 왔을 때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내 품에 쏙 들어와서 손가락을 쉬지 않고 핥아줬을 정도로 사교성이 뛰어났다. 이미 집에 언니 고양이들이 있었지만 한 번도 하악질을 하지 않고 가까이 가면서 친근함을 표시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순둥이 개냥이인 줄 알았던 뚱이와 삐쥬가 경계하면서 하악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뀨가 정말 별난 냥이인 걸 깨달았다. 결국 원활한 합사를 위해 공간을 분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성격이 전혀 다른 고양이를 보면서 이게 천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뀨는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아이였다. 손가락을 핥다가도 갑자기 깨무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건 습성처럼 여겨졌다. 아마도 이 부분에 대해 별도로 훈육을 받지 못했기에 계속해 왔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손가락을 물 때마다 뀨의 머리 뒤쪽을 가볍게 물었다. 가볍게 물었다고 해도 통증이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이러한 행동은 마치 조건 반사처럼 이루어지게 되었고 한 달도 안 되어서 그런 버릇이 고쳐졌다. 타고난 천성은 어떻게 하기 힘들지만 습성은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나이를 점점 먹으면서 활동성이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사람을 좋아하던 뀨의 천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달라진 건 나였다. 어렸을 때보다 때보다는 덜 관심을 줬고 덜 놀아줬다. 덩치가 커지고 무게가 많이 나가면서 꾹꾹이를 받아주기 쉽지 않아 졌다. 고양이 털로 인한 기관지 걱정에 어릴 때와 동침을 하지도 않았다. 죽기 전에도 현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난 3월 9일 오후 3시에 나는 운동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리고 더 이상 몸이 버티기 힘든 뀨는 나를 애타게 찾았을 것 같다. 일반적인 강아지, 고양이들은 본인의 죽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구석진 곳에 숨어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하지만 뀨는 내가 작업하던 책상 밑에서 마치 잠자듯이 죽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나를 오매불망 기다렸던 것 같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된다. 책임지고 한 생명을 제대로 케어하지 못한 부분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할 수 있지만 쓸쓸하게 죽게 한 부분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만든다. 최근 12년 살고 간 고양이가 너무 일찍 간 건 같아서 죄책감이 든다는 커뮤니티에 글을 읽은 바 있다. 6년밖에 살지 못한 뀨를 보게 되면 과연 내가 끝까지 이 아이를 책임진 게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필자는 심재와 좌망이라는 말처럼 마음을 비우는 것이야 말로 행복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뀨에 대한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힘든 시간을 지내는 걸 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부질없고 허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 19화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