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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가족이 될 수는 없는 건가요?

'남'과 '식구' 그 경계의 모호성

by Who am I

누가 가족인가요?


신상옥 감독의 영화 1961년 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우연하게 다시 보게 되었다.

단편소설인 원작 소설과 달리, 당시 사회를 배경으로 좀 더 확장된 스토리로 만들어진 이 영화가

생각보다 잘 만들어진 것에 놀랐다. 감독은 젊은 과부인 정숙의 가족에 두 명을 더 추가. 정숙의 시어머니와

하층 계급인 식모를 추가해 이야기를 더 확장시킨다. 식모의 결혼이 일종의 희극인 것을 뺀다면

이 두 사람은 정숙의 선택에 영화적인 설득력을 더 높이는 역할을 하는데, 이 둘의 역할은 젊은 과부인

정숙이 끝내 결혼을 못하는 이유를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한다.(시어머니는 질서 차원에서

식모는 계급과 체면차이에서)

우리가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는 시대가 60년대

한국이라는 것, 그리고 기존에 남아있던 유교문화와 서양사회로 인한 가치관에 변화가

심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영화는 얼핏 과부의 집에 사는 하숙생 그리고 그들을 이어주는 딸이라는 드라마적인 소재를

쓰고 있지만, 한 단계 높여서 영화 속 주인공의 내부적인 심리갈등과 사회적인 부조리를 파고

드는 수준까지 가려했던 노력이 얼핏 드러나 보였다.


영화 속 정숙은 대략 20대 초반에 결혼해 1년 안에 남편을 잃었고, 그 후에 아빠를 모르는 딸과

시어머니와 단둘이 7년을 살았다. 이후에 옥희가 하숙인으로 들어온 '아저씨'인

손님과 사이가 좋아지면서 문제가 점점 커진다. 정숙이 남편이 없고 정숙의 딸인 옥희가 이 손님을 좋아하고

한 집에 살게 되면서 마치 가족과 같은 분위기가 우연히 조성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도 이 집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이란 것이 존재하는데, 60년대까지도

한국이 시댁을 버리고 혼자 떠나는 과부의 재혼에 개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적 설정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정숙의 주변인물들은 정숙에게 '재혼은 요즘 시대에 흠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설득한다.

하지만 그런 주변인물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정숙에게는 홀 시어머니가 있다. 죽은 남편의 가족이라고는

오직 시어머니뿐인 이 집에서, 정숙이 그토록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실 원작 소설에서는 재혼으로 인해 딸인 옥희의 미래가 고민된다는 식으로 다뤄졌지만

그런데 영화에서 옥희의 존재는 할머니의 존재적 가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비교할 바가 되지

않는 정도이다. 그걸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변화하는 당시 사회에서도 여전히

한국에 유교적 질서와 '효'가 중심 가치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 단지 보수적인 유교사회를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정도였지만, 할머니가 직접적인 존재로 등장한

순간 영화관객은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는 가치적 판단을 내리고 끝내버리는 것.

(영화는 도덕적 가치관을 마땅히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그렇지 못한 사회적 문화 속에 갈등하다가

'바람직한'쪽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뭔가 확실하지는 않다)


외국인에게 한국문화를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


우리는 이 영화의 맥락적 측면을 알지만, 외국인에게는 주인공들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들 키워드를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이런 영화자체를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람이 아닌 누군가가 인생에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을 넘어 왜 '효와 유교적 질서'가 심판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사는 여자에게 모든 조건이 다 맞는 재혼 상대가 7년 만에 나타났는데, 그럴 거면 다 같이 모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면 되지 않냐는 결론이 답이 될 수 없고 한국에서 드라마 단골 소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아이는 아빠가 필요하고 부인은 남편이 필요하고 어머니는 아들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러나 그 모든 질문에 합리적인 선택이 답이 될 수 없는 것은, 유교의 수직적인 질서의 맥락 차원에서 이해

해야 한다. 수학에서 모든 수는 서로 계산하고 빼고 나눌 수 있는 같은 조건을 갖고 있지만, 이곳 사람에게는 그게 되지 않는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본인의 마음을 열어야 하고 그 사회에 속할지 선택해야 하지만, 한국사회는 그보다 더 복잡한 차원으로 해석된다. 정숙 입장에서는 시어머니가 현실에 존재하는 한 자신이 원래 속한 집 안을 벗어나 새로운 가족을 선택하는 것이 기존 가치에 대한 '배신'이며, '손님'은 결코 말을 나누거나 가까워져서는 안 되는 존재다. (이 시대 여성의 수동성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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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문화가 강한 당시 상위계층 사람들 입장은 (지금은 그보다 덜한가? 모르겠다.) '손님'의 존재는 우리 집에 결코 더해질 수 없는 '남'인데 이것은 '식구'라는 개념과 대비되는 일종의 경계선이다. 한국인에게는 낯선 이에게 먹을 것을 막 전해주는 '정'이 있는 반면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에 보수적인 이중성이 존재한다. (실제로 정숙의 가족들과 손님은 서로 어긋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매우 예의 바르고 서로에 대해 불편할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겉으로는 매우 친해 보이고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 돕고 도와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친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는 행동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는 정숙의 태도와 일치하지만, 계란을 밥상에 계속 올리는 것을 보면 다른 한 편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란 결코 끊을 수도 없는 듯하다 )

정숙이 재혼을 한다는 것은 냉정하게 말해 새로운 사람과 가족이 되는 동시에 시어머니와 '남'이 되는 일이다.

새로운 선택이 가치적으로 옳았다 하더라도 버리고 온 가치를 정당화하기란 쉽지 않다. 이 당시 분위기로 봐서 고작 40대 후반에 비교적 정정한 시어머니라고 해도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버리고 혼자 잘 살러간다'는 것은 도덕적 징벌 같은 차원이다. 그래서 정숙은 재혼이 본인에게 도움이 될까?라는 실질적인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차원의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주변에서 '재혼은 흠이 아니라'라고 하면서도 '시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며느리'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도 아주 흔했던 것 같다. 대중은 매주 변하기 쉬운 가치를 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덕적인 엄중함을 놓치지 않는다. 이는 미국 작가인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나 '테스'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


이 이야기가 지난 시대에 고리타분하고 낡은 이야기라고 들릴 수도 있다. 요즘 시대에는 이런 정도의 재혼은

고민의 축도 끼지 못할 테니까. 지금처럼 개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합리성을 따지는 시대에 누가 정숙같이 고지식하게 살겠어.라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주변에는 시어머니가 재혼을 해 시댁의 개념이

사라졌다는 집 이야기도 들린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1960년대의 한국사회가 '유교적 질서'와 '개인의 행복'이라는 가치가 서로 부딪혔을 때, 전자가 맞다고 한다면, 2024년 한국사회는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가? 만약 이미 우리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기존 질서와 갈등을 완전히 극복해 버린 사회라면, 우리는 '그저 행복한 데로 살면 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저 현실 대로 있는 그대로만 설명해도 그냥 이해가 되는 수준이니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현실적인 조건만을 떠나 , '우리 들 만의 문화'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편견'도 많다는 것을

묘하게 느낀다.

아직도 어딘가에는 한번 속한 조직은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윗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 뭔가를 잘못해도 너그럽게 넘어가야 하며, '남'에게는 결코 진짜 속을 드러내지 말라는 문화. 기존의 조직을 깨고 들어온 새로 들어온 이가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합리성의 차원과는 다른 진짜 벽을 마주하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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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정치 갈등 속에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 되어' '모두 다 같이'를 외친다. 그들은 모든 일에 같이 웃고 같이 울고 하나가 되어 서로의 감정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감정공동체의 일원이 된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외치는 '하나'는, 분명 그 안에 속해 있지 않는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무시하는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소외된 그들 역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또다시 '하나 되어'를 외친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들이 꿈꾸는 '하나'되는 사회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가족 같이 사적인 조직은 그렇다고 치자. 어차피 개인들 간의 사랑으로 만나서 태어난 공동체이니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조직이 '가족'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족이어서도 안되고 말이다.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이니 말이다.

적어도 대한민국 사회에서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 사는 시민이라면, 공적인 자리에서만큼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떼어서 더이살 '우리'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배타적으로 나와 '남'을 가르는 경계선이 되지는 않는지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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