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 무거운 침묵을 깰 수 있다면
<기사단장 죽이기> 관련 남은 썰들.
<기사단장 죽이기>와 관련된 하루키의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그의 아버지는 2차 대전시 중일 전쟁에 참전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중국군 포로를 처형한 이야기도 듣고 자랐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2차례 군에 징집되었으며 전후에는 국어교사로 활동했다. 하루키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매일 불전에 기도를 드리면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명복을 빌었다는데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의 이런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그리하여 노년이 되어 자신이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날 즈음 그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통해 그 기억을 써 내려간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종전 후 5년 만에 태어난 그는 완전히 전쟁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어린 시절을 보내며 살아온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어린 시절 떠나보내도 자꾸만 돌아오는 고양이처럼 전쟁과 역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살아갈 수 없다는 각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마치 위대한 개츠비가 친구들과 파티 후 갑작스레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더 이상 어떤 것도 즐겁지 않게 되었듯, 인생의 뒷부분이 갈수록 씁쓸한 맛만 남기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즐거운 날이 적어지는 노년이 되어갈수록 부모와 과거가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란 그렇게 먼 것이 아니다. 3대가 살아온 시간이란 얼추 100년 정도로 잡을 수 있는데 나와 할아버지 세대에는 2차 대전과 21세라는 간격이 있다. 그러나 내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와의 관계는 우리 아이와 나의 부모님과의 친밀함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어려운 것이어서 나는 그 선을 넘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 시대가 겪는 2번의 전쟁 2차 대전과 종전 그리고 6.25와 내가 태어난 80년대의 컬러텔레비전 같은 시대 분위기는 절대 섞일 수가 없는 것이라 서로가 너무나 멀었다. 할아버지가 살아온 시대의 이야기를 직접 그분들에게 듣기란 어린 손주에게 너무 난해하고 가슴 쓰린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건 나이가 먹어 그 세대가 거의 끝나버린 지금이 되어서 일이다. 나에게도 역사를 알게 되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이나 그분들을 이해할 여지가 생겨났다. 그리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한 번쯤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역사엔 굵직굵직한 사건이 많지만, 사실 나를 비롯해 우리 집안을 탄생시킨 조부모님들은 그 불꽃같은 기둥을 스쳐간 평범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조선시대 평민들을 비롯해 그 이후로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데아' 따위가 무슨 소용이었겠는가. 아마도 대부분은 그게 뭐냐고 먹는 거냐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피해자이긴 마찬가지였다.
하루키의 아버지가 참전군인이었다면 그 시대에 나의 할아버지는 강제 징집으로 비행장을 닦던 인부 중 한 명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유도 없이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했던 우리 할아버지는 그럼에도 그것을 누구 탓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소송을 건다고까지도 생각조차 못했다. 다만 그 암흑 같은 시간에 할아버지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노력했다. 이 전쟁만 끝나면 집에 돌아가야지. 아이들과 할머니를 찾아야지 오로지 그 생각으로 살아남았을 것이다. 이념과 전쟁의 전차가 지나갔지만 남은 모래들처럼 나의 할아버지는 너무 작은 존재였던 걸까.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운 좋게 튕겨나가 탈출할 수 있었것 것이다. 전쟁을 마치 재난이나 벼락처럼 천재지변 같이 생각된 할어버지는 지식을 배운 적도 없었거니와 누가 옳고 그르고를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종전이 된 후 할아버지는 살아 돌아와 장사와 목수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오히려 그때 강제 노역을 하며 배운 기술이 나중에 집 짓는데 쓰였다고 말하셨다 한다. 그때 배운 토목의 기초(?) 덕분에 할아버지는 아버지 어린 시절 인근에 여러 채 집을 직접 지어 파셨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가해자 탓을 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생존의 기술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진짜 마음은 알 길이 없다.) 내가 태어나던 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가족들은 할아버지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겪은 두 번의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실향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의 무게로 인해 할아버지에 대한 어떤 것도 화제로 떠오르기 힘들었다. 그렇게 내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영정사진 속 할아버지는 20대의 젊은 모습으로 침묵 속에 묻혔다. 시대의 철저히 피해자였더라도 후손인 누구도 감히 입에 올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 속 인물과 내가 겪은 유일한 공통점은 피해자로서의 우리 할아버지도 과거에 대해 입을 다물었고 가해자로서의 그분들도 입을 다물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녀에게도 손주에게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분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전쟁이 아니었기에, 강제로 징집되어 중일전쟁에 참전한 누군가도 강제노역을 한 우리 할아버지도 어느 누구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은 있었지만 주체는 없었다. 반성도 없었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원했던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국어교사로 한 사람은 토목일 하면서 누군가는 관료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고 생을 이어가며 과거를 잊어갔던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전쟁을 겪었던 세대에는 부정할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아마다 도모히코처럼. 아이를 낳았지만 밝은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법을
잃어버린 아버지들이 그 흔적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태어난 전후세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부모를 둔 세대로 자라나게 되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전쟁을 듣긴 했지만 직접 겪어본 적이 없는 세대. 그들의 부모세대는 어두웠지만 자신들의 시대는 전후에 새로운 평화와 발전으로 뻗어나가는 그런 꿈을 꾸는 세대. 마치 자동차 바퀴처럼 정신없이 흘러가는 산업화를 따라가는 세대로 자신은 부모와 다르다고 여겼다. 그렇게 모두가 잊으려고 노력했던 와중에 역사 속에서 고통받았던 개개인의 과거를 돌아보고 치유하고 반성하는 그런 과정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다. 시간은 흐르고 과거는 밀렸 나갔다. (그러나 잊으려고 하면 완전히 잊을 수 있는 것인가. 그건 일본에게도 한국에게도 물어보고 싶은 문제이다. 정말로 다 잊었다고 생각하고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는 걸까.) 거기에는 커다란 단절이 있다. 결코 말할 수 없는 정도의, 어마 어마한 분노로 뭉쳐진 그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유령이 되어 때가 되면 지금도 '기사단장 이데아'가 되어 돌아다니는 정도이다. 그것이 간접적이건 직접적이건 한국에서 살아본 사람이면 다 안다. 그러나 그런 걸로 인해 개인적인 분노를 품기엔 나 역시 너무나 작다. 그럼에도 일본산 수산물을 먹어지지 않고 뉴스에는 화가 난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징비록을 쓰면서 빠짐없이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고자 했다. 아마 그 시대 사람들에게도 전쟁은 잊고 싶었던 기억이었을 것이다. (놀라운 건 징비록을 일본인들도 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들은 이순신에 대해 대단히 관심이 많았다. 기록이란 쌍방향으로 통하기 때문인 걸까) 그렇게 끔찍한 기억을 어떻게 다시 삶을 이어가겠는가. 그러나 그분이 대단했던 것은 그런 고통스러운 기억마저도 후손을 위한 역사의 지혜로 남기기 위해 감내했다는 것이다. 모두를 위해서.
그분의 높은 통찰력과 용기 덕분에 우리는 옛 전쟁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을 날 것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감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지식인의 양심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말이 아니면 글이라도 남겨서 후세에 전달하고자 했던 노력과 전문성.
그러나 아마다 도모히코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렸지만 발표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두려움이 너무 많았다. 그림처럼 감추고자 해 결국 다락에 넣고 전통지로 감싸 불태워 버리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없애버릴 수 없었던 건. 하루키가 소설 속에서 그러나 적어도 두 명의 목격자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고 본다. '기사단장은 있어'라고 자는 딸의 귀에 속삭이는 아버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