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때로는 적절한 도움이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한 줄기 빛과도 같다.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뒷배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많은 경우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주길 바란다. 나의 수고로움은 진중한 마음씀과 그간의 고통으로 충분했으니, 이제 행운의 여신이 손이라도 내밀어주면 내 인생은 잘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쯤은 해도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못 이기는 척 이끌려 간 적도 수차례. 그 이상일 확률 100%.
필요한 만큼 적절하게 살을 붙여 서사를 만들고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영웅담 이상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부족한 듯 차오르는 역량을 겸비했음이 미덕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그 '적당한' 선을 유지해야 한다. 이러나 저라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시간이 지나도 나의 서사는 온전히 나로 인해 펼쳐졌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완벽은 피해야 할 수렁이었다.
세상을 혼자 살 수 없는 것과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확연히 다른 영역인데 대충 그게 그거지 하며 어물쩍 넘어가는 건 부끄러움에 대한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일말의 양심에 기인한 탓일 거다. 이 '손'에 대한 영향력은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실체조차 없는 허구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분명한 것은 맹목적인 조아림 뒤에 신격화되어 있는 타자의 도움, 그 '손'의 무소불위 권력에 대한 부풀려진 해석과 막연한 기대가 엉겨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울림과 원조는 사뭇 다른 형태이기도 구석구석 닮아있기도 하다.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따뜻한 손을 움켜잡고 함께 걸어가는 그림은 표면적으로 이상적이지만, 면밀히 드려다 본 조각의 현실은 너와 나의 '관계'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현실 풍자극과 다름 아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합리화 뒤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적어도 나 스스로에 대한 기준으로 내키는 일과 그렇지 않은 행위에 대한 구별도 어려워지는 감각의 둔화를 경험한다.
반추의 시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손을 걷어내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잃어가는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순간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손에 기대지 않고 최소한 글을 빌어 가장 솔직한 나를 만날 자격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니 내 안의 것을 끄집어내어 이 것이 내 것이다 떳떳하게 말할 수 있고 그로 인해 공감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단계까지 간다면 그야말로 완전체로서의 내가 되는 것이 아닐까. 설령 외부세계에서의 드러남이 없더라도 '나는 나로 살았네' 하며 웃을 수는 있을 테니 실패한 삶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