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알게 된 건 무척 오래된 일이다. 기사를 찾아보니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때 그녀는 암 투병기를 daum 칼럼에 연재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내 마음속에 그녀가 특별한 형태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녀가 죽음을 앞두고 생산했던 생생한 글들이 모니터에서 아른거린다. 그녀가 두들겨낸 활자, 그것은 생명의 고통과 고독에 대한 슬픈 고백성사였다. 난 처음 활자의 무거움을 알았다. 글을 읽을 때마다 고통과 고독 그 덩어리들이 피부에 닿았다.
그녀는 일기를 쓰듯 그날그날 일어난 일들을 게시판에 올렸다.
칼럼이 알려지면서 순식간에 네티즌들의 관심을 받았고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녀의 글이 올라올 때마다 읽는 이들의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올린 글에는 죽음과 고통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았다.
살아가면서 죽음을 경험해 보기는 어렵지만 고통은 누구나 겪으면서 산다. 일상적인 소소한 고통뿐 아니라 큰 사고로 수술하거나 그녀처럼 불치병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과 죽음과의 싸움 같아 보인다.
암 환자는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아니다.
국립암센터나 종합병원에 가보면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암 환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완치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녀와 같이 시한부 생을 살거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 간다.
김현경 씨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러나 네티즌들에게는 그녀가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평범한 가운데서 특별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겪어 보기 전에는 실감하기 어렵다. 네티즌들은 그녀를 통해서 간접 경험을 한 셈이다. 마치 자기 자신도 말기 암 환자인 것처럼 슬펐고 빨리 완치되기를 바랐다.
삶이 행복한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일을 못 사는 인생”이라고 회심곡 가사에도 있다. 생명의 탄생은 신비롭지만 그 종말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지만 그보다 슬픈 것 또한 없는 것 같다. 언젠가 누구나 한 번은 땅속에 영원히 누워야 하는 운명이니 말이다.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고 마광수 교수가 말했던가? 스카프로 목을 매 자살했던 그도 슬프게 갔다.
칼럼을 접고 얼마 뒤, 32살의 생을 마감하고 땅에 묻혔다는 그녀의 부음이 신문에 실렸다.
그때 난 전혜린을 생각했다. 하필 왜 32살일까? 까만 외투에 까만 머플러, 우수에 가득 서린 눈동자, 불꽃같은 삶을 살다 전설 속으로 사라진 전혜린도 32살이었다.
사랑에 대한 희망이 없을 때 가장 큰 시련을 맞는다. 사랑이 없을 때 삶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사랑에 절망을 느낄 때 감성주의자는 괴로움 속에 습기가 말라버린 낙엽처럼 사라져 간다. 전혜린이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의 인물, 니체를 떠올리곤 한다. 그는 얼마나 고독하게 살았던가? 병을 달고 살았던 그의 몸은 종합병원그 자체였다. 나중에는 정신병원이 되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책은 문장이 짤막한 잠언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 이유가 오래 펜을 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통증이 없을 때 잠깐잠깐 쓸 수밖에 없었기에 책이 그렇게 됐다고. 니체에게 그것은 죽어가는 자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살면서 사랑에 절망을 느껴야 하는 순간은 없는 것 같다. 쓸쓸한 날에 쓸쓸한 창밖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도 사랑의 대상이다. 잠시 창밖의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자신과 몇 마디 수다를 떠는 것도 다정한 사랑의 행위다.
우수가 우수수한 일요일.
일요일 날 일요일에 태어나 일요일에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기분은 기묘하다. 이 기묘함으로 인해 나 또한 언젠가 일요일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생각이 든다. 사랑이 기묘한 것인지 인생이 기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창밖의 흐린 날씨마저 기묘하다. 이 기묘함이 전혜린을 죽인 범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