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감정
철학사를 논할 때 헤겔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다고 한다. 헤겔 이후는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헤겔은 철학사 흐름을 바꿔놓을 정도로 영향력이 크지만, 나와 코드가 안 맞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지식에 절대적이라는 것은 없다. 철학적 이념을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장보기와 같다. 자신의 입맛에 맞으면 장바구니에 담는 것이고 아니면 지나치면 그만이다.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에 따라서도 다르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과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두뇌 알고리듬부터 다르다. 때문에 “헤겔”이라는 같은 대상을 놓고도 인식이나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헤겔 철학은 참으로 난해하다. 처음 그의 책을 접했을 때 인상은 횡설수설 정도가 아니라 “귀신씨나락까먹는소리”가 책을 도배한 것처럼 비쳤다. 때문에 내가 처음 헤겔 철학을 접했던 것은 해설서 위주였다.
헤겔 철학은 덩어리가 크고 읽는 맛도 별로(?) 없는 편이다. 지적 호기심도 좋지만, 아무리 차분히 읽는다 하더라도 소화불량에 걸리기 십상이다. 철학 전공이 아닌 이상 그의 책과 정면 대결하는 것은 무리인 듯싶다.
헤겔 철학이 견고해 보이기는 하지만, 철학은 파괴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철학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본다면, 책의 목차는 앞 페이지부터 정립된 사상이 파괴된 순서와 몰살되어져 간 과정을 보여준다. 파괴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파괴되지 않는 것은 종교의 영역이다. 흠이 없는 이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종교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종교는 논리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물처럼 지식도 진화한다. 자연과학도 언제든지 무너지고 파괴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밝혀진 사실 뒤에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로 인해 철학의 목차처럼 앞의 진실이 파괴되거나 수정되는 과정을 밟는다.
헤겔 철학은 광범위하다. 다루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에, 그의 철학 전체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를 비판한 철학자들도 부분적으로만 다뤘을 뿐이다.
한편으로, 그가 다루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에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가 말한 변증법적으로도 그의 철학은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결함이 없다면 그가 말한 변증법이 틀린 것이기 때문이다.
변증법은 헤겔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정신현상학, 논리학, 역사철학, 법철학, 미학 등 그의 철학 레시피에 변증법 양념은 빠짐없이 들어간다.
내가 느낀 헤겔 변증법에 대한 인상은 “진화론”이다. 용어의 표현만 다를 뿐, 논리적 전개는 사실상 진화론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양한 방식의 표현이 있겠지만 일례로 변증법에서 말하는 생명 법칙은 다음과 같다.
“새싹은 씨앗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씨앗이 파괴되지 않고는 싹이 나올 수 없기에, 따라서 새싹은 씨앗을 부정하는 것이며 모순이다. 꽃은 새싹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싹이 파괴되지 않으면 꽃이 나올 수 없기에, 따라서 꽃은 새싹을 부정하는 실체이며 모순이다. 열매도 꽃을 부정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다. 꽃의 상태를 파괴해야지만 열매가 맺힌다.”
하나의 사실(正)에서 그에 대립되는 모순(反)이 발생하고 둘의 투쟁 방향이 발전(合)으로 향한다는 것이 변증법의 요지다. 물론 정반합(正反合)에 대한 정의와 해석은 학자마다 여러 버전이 존재한다. 어쨌든 부정과 모순이 서로 교환되고 통합되는 과정을 통해 헤겔은 세계의 운동 법칙을 설명한다.
이것을 내 생각대로 풀어보면 이렇다. 유기체(正)+DNA복제오류(反)=돌연변이(合), 이것이 내가 진화론적으로 이해하는 변증법이다. DNA 작은 복제오류가 누적되면 다양한 생태계(세계발전)와 우리 인간과 같은 고등 생명체도 나올 수가 있다.
물론 “진화론=변증법”을 학자들이 인정해 줄 리 만무하지만, 복잡한 사변적 수식어들을 모두 제거하면 논리적 체계는 헤겔 변증법이나 진화론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변증법은 인간(正)+자연파괴(反)=문명(合)으로 확장할 수 있다. 수렵 채집했던 원시시대부터 문명의 발전은 자연으로부터 노획한 자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누적되어 오늘날까지 올 수 있었다.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변증법에서 살짝 비껴간 듯 보인다. 한쪽은 발전하고 한쪽은 망해가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정신”을 현실에서 실체를 드러내는 원동력으로 봤다. 가령 조각가의 머릿속에 있는 구상(정신)이 돌덩이에 칼을 대는 순간부터 점점 눈에 보이는 작품(현실)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현실에서 구체화되는 작용의 원천이 “정신”이라는 것이다. 즉 정신(관념)의 작용으로 존재가 탄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존재가 발전해 가는 과정이 변증법이다.
헤겔 철학에서 가장 난해한 개념은 “절대정신”이다. 이것은 神과 비슷한 개념이다. 종교적 의미의 신과는 다르지만, 세상 만물이 현실로 드러나게 한 원천을 헤겔은 “절대정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변증법의 궁극적인 종착점이다. 정반합의 완성 형태, 정반합의 변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그 끝이 바로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이다.
헤겔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절대정신”은 개개인과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자기실현, 자유와 의식의 진보를 구현한다고 말한다. “역사란 절대정신의 자기실현”이라는 말도 이러한 인식에서 나왔다.
역사의 전환은 몇몇 영웅들의 혁명이나 활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헤겔 자신도 절대정신이 영웅을 선택해 자신을 실현시킨다고 보았다. 때문에 나폴레옹이 예나에 입성하는 것을 본 그는 감격에 겨워 “나는 절대정신을 보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유를 모든 시민에게로 확대한다는 혁명이념을 등에 업은 나폴레옹은 그에게 절대정신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절대정신은 헤겔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군은 헤겔의 집을 약탈하고 대학을 폐쇄했다. 그 바람에 헤겔은 직장을 잃었다. 실업자가 된 헤겔은 생계 수단을 찾아 여러 곳을 떠돌아야 했다.
절대정신, 이것은 논리의 결과라기보다는 헤겔의 창작품이다. 내가 가장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계는 끊임없는 정반합의 변화로 이어져 간다는 전제를 해 놓고 뜬금없이 그 끝에 종점(절대정신)이 있다고 한다면, 이 논리는 일관성을 잃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는다.
논리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절대정신도 정반합의 변화를 거쳐 어디론가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멈추지 않아도 변증법 체계에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굴러가는 변증법에 “절대”는 불필요한 사족이다.
진화론적으로도 절대정신은 부정된다. “생명체(正)+DNA복제오류(反)=돌연변이(合)”의 궁극적인 끝은 어디일까? 이것을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에 비유하자면, 진화의 끝은 神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생명체는 神이 되기 전에 멸종할 운명에 처해 있다. 50억 년 후면 핵융합 재료가 소진되어 태양도 사라진다.
변증법에서 말하는 진보는 실체가 불분명하다. “진보”는 상대적 개념이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나아간다는 말일까? 앞, 뒤는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정하는 것일까?
단순히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이유만으로 진보라고 할 수는 없다. 시간적으로 앞에 있는 문명이 진보일 수 있고 후대의 문명이 퇴보일 수도 있다. 만일 인간의 과학 문명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될 수 있다면, 인간이 생명체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헤겔의 주특기는 “변증법”이나 “절대정신”을 들 수 있지만, 나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변증법은 진화론을 떠 오르게 하고 절대정신은 논리가 아니라 주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철학의 거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헤겔 변증법이 마르크스에게 이어진 것은 세계사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았을 정도로 영향이 컸다. 헤겔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바꾸면 마르크스 철학이 나온다. 수학으로 말하면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에 변수 치환법을 사용한 것이다.
철학사에서 헤겔을 비중 있게 보는 이유는 그가 그 이전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종합했다는 것에 있는 듯하다. 그만큼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만큼이나 방대하다.
헤겔을 극찬하는 철학자들과는 달리 내가 헤겔에게서 특징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나 자신이 철학적 소양이 얕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 전공자와 일반 독자가 느끼는 평가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읽기 편한 해설서 위주로 그를 접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일 수 있다.
어쨌거나 젊었을 때 접했던 지식들을 지금에 와서 복습해 보면,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회상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것은 시간의 앨범을 들쳐 보는, 자신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육체는 변했지만 그러나 생각의 회로는 그다지 달라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육체는 100살이 넘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30대 같다”고 말한 것을 나도 실감한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세월의 자국이 역력하게 새겨져 있는, 퇴보한 육체와 달리 변하지 않은 자신의 감정,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어느 때보다 진보한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지난날 슬픔과 고통이 얼룩져 있는 시간마저 이제는 다시 보듬어 보고 싶어 지는 나이에 접어들었다. 가끔 사라지지 않고 기억의 지평에 남아 있는 사랑했던 것들과 마주칠 때면, 그것은 왠지 나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절대정신”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절대정신은 헤겔이 말했던 논리의 결정체가 아니라 개인의 삶에 스며져 있는 감정의 결정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