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잡담 May 19. 2023

죽음에 대해서

- 에피쿠로스 단상 -

죽음에 대해서

      

어느 현자가 말했다. "낙엽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사람이 죽는 건 왜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현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자연의 섭리는 어느 것이나 공평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물리 법칙상 현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물리법칙은 생명이 있을 때와 없을 때를 구별하지 않는다. 박테리아와 인간을 구별하지도 않는다. 수소나 산소, 원자가 달라도 적용되는 법칙은 같다. 인간은 원자가 뭉친 덩어리기에 인간 역시 같은 법칙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매년 16만 명이 사망한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는  4000만 명이 죽는다. 자연사든 재해든 우리나라 인구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가 매년 죽는다는 통계를 보면, 죽음이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가장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가장 알 수 없는 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죽음 다음의 세계는 지금의 감각체계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일이다.     


사후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죽은 사람뿐이다.

그러나 시체가 펜을 들어 그것에 대해 기록을 남기는 일은 없다.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인간의 상상력에 의한 소설일 수밖에 없다. 죽었다가 깨어났다면 그것은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다.

임사체험을 죽음의 경험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생체시스템에 오작동이 생겨 잠시 죽은 것처럼 보인 것일 수도 있다. 사람마다 특이한 체질이 있지 않은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썩은 시체가 나와 인터뷰하지 않은 이상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사후 세계에 관해 이러쿵 저러쿵하는 얘기들은 모두 헛소리라고 단정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후에 대한 해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천국, 지옥, 극락, 연옥, 윤회, 환생... 번데기 뺑뺑이 판을 돌려 다트가 꽂히는 것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그냥 무시해도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알 수 없다면 심각하게 고민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신통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흔히들 그렇게 하지 않는가? 생판 모르는 문제가 시험에 나왔을 때 연필 굴려서 답을 찍듯이 죽음에 대한 문제도 그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나 역시 뺑뺑이 판을 돌리다 보니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 꽂힌다.

첫머리에 쓴 현자의 얘기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요약해서 쓴 것이다. 흔히 그를 쾌락주의자로 알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쾌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잘못된 지식으로 그에 대한 오해가 많다. 그가 말한 쾌락은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을 의미한다.

가령 배고픔(고통) 때문에 먹는 음식은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이 맞지만, 미식가가 먹는 식도락은 에피쿠로스와 아무 상관없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진통제(고통 제거) 목적을 가질 때는 에피쿠로스적인 쾌락이 맞지만, 환각을 위한 것일 때는 에피쿠로스와 아무 상관없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은 고통을 제거하는 목적을 가진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통도 없으면서 즐기는 쾌락은 방탕이지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이 아니다.


기원전 5세기에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론을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의식, 생각, 영혼, 심지어 神마저 그는 물질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더 이상 쪼깨 지지 않는 알갱이(원자)들이 모이거나 흩어짐으로써 세상 만물을 이룬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질의 근원이 소립자라는 것이 밝혀진 오늘날, 고대 시대에 이러한 생각이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은 에피쿠로스에 의해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진다. 같은 유물론이지만 데모크리토스가 “자연” 지향적인데 반해 에피쿠로스는 “인간” 지향적이다.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죽었을 때는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죽음은 산 자나 죽은 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에피쿠로스-』  

   

죽음에 대한 에피쿠로스 생각은 한 마디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가 고통이나 쾌락을 느끼는 이유는 “감각” 때문이다. 죽음 다음에는 원자들이 해체되어 감각도 사라진다. “감각이 없는데 어떻게 죽음의 두려움이나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에피쿠로스 생각은 적어도 현대의 물리학이나 생물학적으로 오류가 없는 정확한 지적이다. 과학적으로 에피쿠로스에 반박할 만한 논리적 수단은 보이지 않는다.

사후에 대한 정보가 일절 없는 상태에서, 어차피 번데기 뺑뺑이 판 돌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논리적인 것을 선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절대로 알 수 없다는 상황에서 신화가 나오고 가짜가 탄생한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후세계와 관련한 사이비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보이스피싱과 비슷하다. 보이스피싱에 넘어가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죽음”은 알 수 없는 비밀의 방이기에 얼마나 많은 상상력이 거기에 동원되었을 것인가? 힌두교 내세관을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대하소설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신념은 심리적인 기대감으로 채워진다. 굿판에 귀신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심리적인 위안이 되는 것과도 같다.     


생물적 감각을 가지고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얼토당치 않다. 썩은 시체를 보면 소름이 끼치지만, 정작 죽은 당사자는 감각이 존재하지 않기에 자신이 썩었는지 어쨌는지 알지 못한다.

생물적 감각으로 죽음을 바라보기에 종교가 생긴다. 끔찍한 시체를 회피하기 위해서 영혼이라는 소품이 등장하고, 감각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천국이 등장하고, 그것을 연출하기 위해 神이 필요해진다.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에 시나리오가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상상 속에서 그렇게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픽션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종교다.     


번데기 뺑뺑이 판에는 실존주의나 염세주의도 있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다. “태어난 이유도 없고, 사는 이유도 없고, 죽는 이유도 없는 우리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무의미한 세계를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염세주의 사상에 빠져 자살자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 자신은 노환으로 죽었다. 자살을 부추겨 놓고 자기는 오래 살았다.

땅 속에 묻힌 쇼펜하우어는 어떻게 지낼까? 삶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처럼 "죽음도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고 무덤 속에서 투덜거리고 있지 않을까? 어차피 무의미한 삶이라면 결혼이라도 해서 알콩달콩 살 것이지, 그는 여성을 혐오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사람마다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에 사고방식이나 취향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사기꾼에 잘 속는 사람도 있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속지 않는 사람도 있다. “속고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뺑뺑이 판을 돌리든 안 돌리든 어떻게 살든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고통이 없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마라. 육체적 고통만큼이나 마음의 고통을 없애는 철학(지식)을 공부하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한때는 자신이 원했던 것임을 잊지 마라. 아무것도 아닌 죽음을 불안해하지 마라.” 이것이 에피쿠로스가 전하는 인생의 가르침이다.

에피쿠로스에게 세뇌당한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이전 02화 스피노자 감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