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상에서 제정신으로 -
포이어바흐 철학 단상 - 공상에서 제정신으로 -
역사적으로 인류의 지성은 플라톤이 다져놓은 공상(이데아)에 기대며 근근이 흘러내려왔다. 그 공상이 헤겔에 이르러 정점을 이루고 끝내는 제정신을 차리는 철학이 등장했으니, 그 출발점이 포이어바흐라는 것에 이견을 보이는 학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제정신 철학”의 선구자로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들 철학은 일반 대중에 쉽게 스며들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때까지만 해도 인류의 자연과학 지식이 너무도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벼락은 왜 치는지, 천둥소리는 왜 나는지, 전염병은 왜 생겨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보다는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었다.
망원경이 발명되면서 갈릴레이는 1609년 천동설이 맞는지 검증했다.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제안된 천동설은 중세까지 태양계 운동을 설명하는 유일한 지식이었다. 그러나 망원경 단 하나의 과학적인 발명품으로 인해 1500년 동안이나 옳다고 믿어왔던 사실이 뒤집히고 말았다.
그동안 인류가 얼마나 공상 속에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해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특히 종교에서 파생된 지식은 무지의 극치였다. 중세에는 흑사병이 악마의 소행이라 믿었고 이것이 마녀사냥으로 이어졌다. 뱀이 사람(하와)에게 말을 하는 신화가 사실로 여겨졌고, 정자 속에 아주 작은 인간이 들어 있어서 아기가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공상 속에서 뜬구름 잡던 인류가 제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는 자연과학에 눈을 뜨고부터다. 특히 19세기는 철학의 한 분야로 취급되었던 과학이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길을 갔다.
다윈 진화론, 막스웰 전자기학, 지멘스 다이너모, 파스퇴르 세균학, 헤르츠의 전파, 톰슨의 전자, 플랑크 양자이론,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 등 오늘날 과학의 기반이 된 지식이 19세기 단 1백 년 기간에 쏟아져 나왔다. 포이어바흐가 생존했던(1804~1872) 시기는 과학혁명 시대였다.
이러한 변화는 철학에서도 일어났다.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서양 철학을 뒤집어놓았다. 그의 철학 펀치력을 측정해 볼 수 있다면 아마도 갈릴레이 지동설 정도의 파급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기독교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기독교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하다가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니체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니체도 한때는 신학생 신분이었지만 저서 대부분은 신을 부정하는 내용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神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지만, 포이어바흐는 "神이 인간으로부터 나왔으며 神이 없는 인간은 가능하더라도 인간 없는 神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神은 인간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다.
동시에 神은 인간의 거울이다. "인간이 가장 고귀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투사하듯 하늘에 쏘아서 발생한 이상적인 모습, 그 환상이 곧 神이다." 때문에 포이어바흐는 신학을 인간학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신학을 분석하면 인간의 속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神이란 유한한 것을 무한으로 포장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종교란 神이 실제로 존재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 神의 존재를 믿고 싶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종교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대표적인 개념이다. “인간의 고귀하고 긍정적 가치를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고, 가장 나약하고 부정적인 것은 인간의 것으로 만든다. 즉, 神을 풍부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인간은 빈약해지고, 神에게 모든 것을 집중시켜 인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스스로 소외당하는 종교를 믿는가? 포이어바흐는 “대리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가치를 아는 대신 신에게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여 그것을 통해 대리 만족한다.
어린아이들은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나 슈퍼맨을 흉내 내고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神의 존재는 그것과 같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그것이 바로 神이라는 것이다. 즉 종교는 상상의 것을 통해서 위안을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자위수단으로써의 성격을 가진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으로서의 神 이외에 어떤 神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학 혹은 심리학으로서의 신학 이외에 형이상학적인 신학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헤겔은 인간 정신과 神의 정신을 둘로 나눠 인간의 정신을 神의 정신 한 부분으로 보았지만, 그에 반해 포이어바흐는 인간 정신과 신의 정신을 둘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 둘은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포이어바흐 생각을 역사학과 연관시키면 그 내용은 더욱 명확해진다. 역사학에서 종교의 기원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 죽음의 공포로부터 기원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고대 인류는 불확실성에 휩싸인 채 살아야 했다. 언제 맹수에게 물어뜯겨 목숨을 잃을지, 천재지변이 일어나 집이 허물어지고 농사를 망치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자연 현상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모든 것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에 인간은 성공적이고 안전한 사냥을 기원하며 동굴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자연을 다스리는 초자연적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며 복을 빌었다. 이러한 행위들이 조직화, 체계화되어 종교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 여전히 종교가 건재한 이유는 심리적인 관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오랜 기간 굳어져 온 신념이 관성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포기하기 힘든 환상(천국과 지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종교적인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진시황의 불로초 심리라고 볼 수 있다.
심리적 관성의 일례로 코페르니쿠스를 들 수 있다. 갈릴레이보다 100여 년 앞서 지동설을 주장했지만, 1500년 동안이나 굳어있던 천동설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간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공고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늘날 인공위성이 날아다니는 시대에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칸토어가 “무지의 보존법칙”을 말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무지도 하나의 신앙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인식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를 삶의 최고 가치로 생각한다. 고정된 틀에 생각을 가두면 행동도 구속받게 된다. 불로초(천국)를 원하게 되면 그 환상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는 쓸데없는 짓이 따르게 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 인식의 자유는 “사실인 것과 아닌 것”의 식별에서부터 온다. 상식적으로 뱀이 하와에게 말을 건네는 신화가 사실이 되려면 지금의 시대에도 뱀이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 죽은 사람이 부활할 수도 있다면 지금의 시대에도 그러한 일들이 틈틈이 뉴스에 보도되어야 한다. 왜 그때는 그렇고 지금은 아닌가?
지식은 뷔페에 차려진 음식과도 같다. 섭취하든 안 하든 개인 취향에 달린 문제다. 또한 지식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마약이나 도박을 하면 패가망신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즐기는 사람도 있다. 나 또한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술, 담배를 즐기는 편이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고대 중국 제왕들은 수은이나 비소를 “건강식품”으로 알고 섭취했다. 당연히 중금속에 중독되어 일찍 죽었다. 무지는 때때로 치명적일 수 있다.
“신학에서는 성스러운 것이 진리지만 철학에서는 진리만이 성스러운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이런 말을 남겼지만 나는 다르게 바꾸어서 이해한다. “철학에서는 진리가 성스럽지만 삶에서는 일상이 성스러운 것이다.”
자신의 삶과 자신과 함께 숨 쉬고 있는 일상의 모든 것, 하나하나가 성스러운 것이다. 죽고 나면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기에 그보다 더 성스러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 때문에 주어진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주변의 것들을 더불어 사랑하는 일보다 더 성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