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잡담 Sep 20. 2023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사랑할 때와 죽을 때  


2022년 2월에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과거와 달리 드론 등 다양한 무기체계로 인해 희생자도 늘어나고 있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 사망자가 1만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전쟁의 참상을 너무나도 잘 안다. 오래된 역사를 들춰 볼 것도 없이 인류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참상을 잘 알면서도 왜 전쟁은 끊이지 않는 것일까?

 

국제사회는 약육강식이 법이다. 서로 먹고 먹히는 곤충이나 동물 싸움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전쟁이라는 양상으로 표현될 때 개인(군인)에게도 정글 법칙이 적용되는 참상으로 나타난다.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이나 집단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광적인 현상이 두드러진다. “묻지 마 범죄”를 저지르는 개인의 심리가 국가에서도 똑같이 발생한다.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정신이상자나, 식민지를 침탈한 제국주의 열강들이 그러했다.

정글 법칙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찾아볼 수 없다. 병사들은 전쟁의 부품에 불과할 뿐이다. 진흙탕에 처박히거나 탱크에 깔려 뭉개진 시체를 보면, 처음에는 섬뜩하지만 이내 익숙해진다.    

 

게임에서는 아무런 감정 없이 캐릭터를 사냥하고 죽인다. 전쟁에서의 현실은 그것과 같다. 제1, 2차 세계대전 기간 1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죽음이 일상화되면 감정은 사라지고 무감각해진다.

레마르크 다른 작품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이러한 무감각을 잘 표현해 주는 장면이 있다. 휴전협정 발효 15분을 앞두고, 독일군 한 장군이 전공을 세우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막 들어온 신병들까지 싹 긁어모아 출격 명령을 내린다.

젊은 병사들이 총알받이로 죽어 가는데도 그날 전선사령부가 본국에 보낸 전황 보고는 딱 한 줄이었다. “서부 전선 이상 없음.”     


전쟁은 언제나 늘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 전쟁은 군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전선에는 아무 이상 없는 듯 보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삶 자체가 전쟁이다. 하루하루가 무엇인가를 쟁취하기 위한 전투의 나날이다. 전쟁을 벌이는 방식과 물리적인 형태만 다를 뿐이다.

최근에 사회문제로 떠오른 보이스 피싱, 전세 사기, 다단계는 많은 사람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 사건이라는 조희팔 다단계에 속아 넘어간 사람 중에 자살자가 30명 넘는다고 한다. 사람 죽이는 무기가 “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신성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성”은 추악함을 가리기 위한 위선적인 형용사일 뿐이다. 전범국인 독일도 한때는 “신성로마제국”이었다. 그러나 제국에는 신성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며 거룩한 구석이 발톱만큼도 없었다. 지배층의 허영과 명예만 있었을 뿐이다. 이 소설에도 그러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정치인과 장군이 안락한 거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최전방에선 또 다른 젊은 군인들이 죽어갔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전쟁 중임에도 장관이나 고위직 부정부패가 심각하다는 뉴스가 그것이다. 오죽하면 젤린스키가 러시아와 싸우는 와중에도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을까?    

 

그러나 상황이 어찌 되었든 세상은 돌아간다. 안락한 거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든, 진흙탕 속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든, 신성하든 추악하든 눈이 내리면 모든 것이 덮이듯 자연은 모든 것을 덮어 버리고 다시금 새로운 시작을 탄생시키곤 한다.

『신기해요. 그래도 봄이 온다는 게. 여긴 파괴된 거리이고 봄이 올 이유도 전혀 없어요. 그런데도 어디선가 제비꽃 향기가 나는 것 같아요.』

폐허가 된 거리를 연인과 거닐며 엘리자베스가 했던 말이다. 전쟁과 상관없이 제비꽃은 어김없이 핀다는 것, 인간사와 상관없이 자연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 인생이 그렇고 역사가 그렇다.     


절망적인 가운데 작가는 하나의 희망을 그려낸다. 폐허가 되었어도 꽃이 피듯,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누군가를 사랑할 때 세상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3주간의 휴가가 끝나면 에른스트는 다시 전선으로 복귀해야 한다. 죽음이 일상인 전선에서 에른스트는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엘리자베스는 망설임 없이 그와 결혼한다. 어쩌면 죽음과의 사랑일지도 모를 도박.

작가는 전쟁이라는 야만적인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사랑하는 것, 절망 속에서 투여할 수 있는 모르핀은 사랑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랑은 이상이고 죽음은 현실이었다.   

  

『나는 슬퍼, 내일 당신과 작별할 생각을 하니 죽을 것처럼 슬퍼. 그러나 내가 슬퍼하지 않으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 내가 당신을 결코 만난 적이 없었던 거로 하는 거지. 그렇게만 된다면 슬퍼하지 않고 그 대신 공허함을 안고 덤덤하게 떠나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슬픔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닐 거야. 그것은 말하자면 어두운 행복이야. 행복의 다른 쪽 한 면.』     


슬픈 사랑도 아름다운 것일까? 레마르크는 그것을 어두운 행복이라고 말한다. 어둡기는 해도 행복은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마저도 없으면 폐허 속에서 남는 것이라곤 절망뿐이기에.

언젠가는 죽는다는 점에서 인생은 누구에게나 고독한 여행이다. 1인 가구가 많은 요즘은 고독사 시대이기도 하다. 사랑이 남용되는 시대이기에 사랑해도 외롭고 홀로 있어도 외로운 시대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설사 그것이 화려하지 않은 어두운 행복이더라도 절망보다는 낫다고 말하는 듯하다.    

 

심심찮게 나오는 뉴스라 새삼스러울 것 없지만, 취할 때마다 5060 고독사를 떠올리곤 한다. 바닥에 쓰러지면 소설에 나오는 전사자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누워서 레마르크를 생각했다. 눈이 녹을 때마다 전사자 시체들이 나타나곤 했다지, 2월의 눈이 녹으면 1월의 전사자가 나타나고, 1월의 눈이 녹으면 12월 전사자가 나타났다고 했다. 나는 몇 월의 전사자가 되는 게 나을까?

그러나 영영 발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눈이 녹지 않으면 전사자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이전 06화 죄와 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