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명을 믿지 않지만, 세상에는 운명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운명적으로 보이는 것도 실상 그냥 우연일 뿐이지만, 그러나 우연 중에서도 특별한 우연을 “운명”이라는 용어를 붙이기로 한다.
트윈스터즈는 그런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로 있었던 다큐멘터리 형식의 논픽션 영화다. “운명”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도록 하는 영화다. 또한 운명을 넘어서 생(生)을 살아가는 관점, 자신의 존재에 많은 상상력을 떠올리게 한다.
“인생은 소설이다”라는 소설도 있지만, 이 영화가 바로 그런 감각을 일깨워 준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휴머니즘이 있다면, 소설 같은 인생, 추상화 같은 운명 속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감정이 아닐까?
1987년 부산에서 쌍둥이 자매가 태어났다. 두 사람은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각각 미국과 프랑스 가정으로 입양됐다. 태어난 직후 서로 다른 나라에 입양됐던 쌍둥이 자매가 25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만나게 되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다.
미국으로 입양된 사만다는 영화에 출연하는 단역 배우로, 프랑스로 입양된 아나이스는 패션 디자이너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다. 평생 서로를 모른 채 살던 두 사람은 2013년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통해 기적적으로 재회했다.
두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었다. 사만다가 배우를 했기에 망정이지, 다른 직업이었으면 둘은 평생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사만다가 출연한 영화(유튜브)를 본 아나이스의 친구가 있었다. 유튜브에 나온 배우 얼굴이 아나이스와 너무도 닮은 것을 보고 아나이스에게 알려 줬다고 한다.
『안녕? 난 런던에 사는 프랑스 여대생 아나이스라고 해. 두 달 전 내 친구가 네가 출연한 유튜브 영상을 보고는 나와 굉장히 “정말 아주 많이” 닮았다고 하는 거야. 장난 그만치라고 화냈지. 그리고 오늘 그 친구가 또 네가 출연한 영화 “21 & over” 트레일러를 보고는 같은 장난을 치더라고. 사실 많이 닮은 것 같아. 네가 누군지 구글 스토킹을 했어. 그리고 네 생년월일이 1987년 11월 19일이라는 것을 찾아냈어. 나는 한국 부산에서 태어난 입양아야. 혹시 한국 어디서 태어났는지 말해 줄 수 있겠어? 너랑 나랑 생일이 똑같거든. 그리고 우리 많이 닮았어.』
운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영상통화를 통해 한 핏줄임을 직감하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 두 사람이 쌍둥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3개월 뒤 미국에 있는 사만다가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 두 사람은 대면하게 된다. 태어난 지 25년 만에 자신의 유일한 핏줄을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의 상봉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산가족 만나듯 서로 부둥켜안고 펑펑 눈물 흘릴 만도 하지만, 막상 첫 만남은 남녀가 소개팅하는 자리처럼 어색하게 마주하는 장면이었다.
『당시 문이 열리고 사만다가 들어오는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정말 나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여러 감정이 복받쳐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은, 자석이 밀어내다가도 다른 극이 서로 붙듯이 딱 붙는 느낌이었다. -아나이스-』
『아나이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입체로 된 나였다. 나는 영혼이 몸을 떠나 자신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치 내가 아는 꿈에 나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만다-』
이 영화는 사만다가 자신의 놀라운 경험을 카메라로 담기로 하면서 만들어졌다.
미국과 국내에서 개봉되었다. 영화 감독자가 사만다라는 사실도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다. 1인 미디어 시대가 실감 난다. 이 영화는 페이스북 개설 10주년을 기념하는 ”최고의 페이스북 스토리 톱10”에 선정되고,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WSX) 수상작으로 선정돼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 자료를 찾아보니 생모를 만났다는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생모의 행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큐 제작 당시 수소문해서 생모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모는 자신이 아이를 출산한 사실을 부정하고, 두 자매를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죄책감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자매가 생모에 대한 그런 소식을 들었을 때, 카메라에 비친 그녀들의 표정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깊은 그리움과 한 조각 슬픔이 없지 않았을까? 동물이나 사람이나 어미에 대한 정서는 같은 것이다. 25년 동안 생모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만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행복해요.”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나기도 하고 실실 웃음이 나기도 했다. 옆에 누군가 있었으면 실성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영화를 찍을 당시(2014년)에 쌍둥이 두 사람이 25살이었으니 지금은 30대 중반 나이가 되었다.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또다시 10년의 세월은 훌쩍 지나가 버릴 것이다.
사만다를 처음 봤을 때 아나이스는 “평행우주에 있는 자신을 만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자신,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 자기 자신을 만난 기분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자신을 만난 기분? 그 기분이 어떨지 상상이 안 간다. 나는 쌍둥이가 아니기에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은 없겠지만, 아나이스가 언급한 평행우주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평행우주(다중우주)는 우주론에서 이론적으로만 언급되는 개념이다. 빅뱅 이론의 한계와 양자역학의 특성으로 인해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안된 이론이다. 이것은 지금 존재하는 이 우주뿐 아니라 저 멀리 어딘가에, 혹은 공간이 아닌 차원이 다른 어딘가에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실제로 소립자들은 쌍으로 생성되고 쌍으로 소멸하기에 모든 물질에 쌍둥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중우주에서는 우리 몸과 지구에 존재하는 물질의 패턴이 다른 우주 어딘가에서 반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양자역학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감각계를 넓은 의미로 확장한다면 “신경계-입자계-파동계”로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감각은 정보를 인식하는 소통 수단이긴 하지만, 공간에서의 차원처럼 서로의 감각적 차원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평행우주가 있다면 우리의 감각계와는 다른 차원일 것이다. 가령 생물계 감각은 신경계지만, 입자나 파동의 감각은 에너지 정보다. 에너지 정보에 의해 감각반응이 이루어진다. 화학반응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붙을 것인가 말 것인가?” 원자의 감각 정보로 인해 분자가 형성되거나 분해된다.
입자들은 쌍으로 생성되고 쌍으로 소멸하기에 입자로서의 삶이 끝나면 다시 파동으로 돌아간다. 입자와 파동은 성질이 다르기에 감각시스템도 같지는 않을 것이다.
생물계는 “변화”를 인지하기 때문에 시간이 존재하지만, 차원이 다르면 시간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우주에서 몇백억 년 지난다고 하더라도 무생물계에서 그것은 1초보다도 짧은 시간이다. 신경계가 없는 상태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취된 환자가 깨어났을 때 몇백억 년이 지났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죽은 다음에는 감각계 차원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우주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무한대의 확률이 존재하는 우주이기에, 쌍둥이 입자로 형성된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보다 존재할 확률이 더 높다.
이것은 로또복권 1억 장이 팔렸을 때, 확률이 1/1천만 인 1등 당첨자가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과도 같다. 평행우주에 따르면 무한 장의 로또복권이 깔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중에 나와 똑같은 것이 있을 확률이 왜 없겠는가?
다행히 사만다와 아나이스, 둘 다 천사 같은 심성을 지녔다. 만일 한쪽이 범죄자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호기심으로 둘이 만났다 하더라도 행복감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서로의 인간성이 이질적이라면 쌍둥이라 하더라도 심리적인 결합은 어려운 일이다. 새삼 뿌린 대로 거둔다는 속담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보이저 1호가 지구를 향해 찍었다는 사진을 본다. 수많은 별과 은하, 성운의 더미 속에 마음을 담가본다.
그 영원의 속살, 당장 육체가 분해되어 달려가고 싶은 시공의 지평, 상상할 수 없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상상할 수 없는 감각의 세계. 우리의 의식이 생체 감각을 떠나면 천상병 시처럼 지구에서의 삶이 소풍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으로 보일 때, 그때쯤이면 지금의 삶이 다시 돌아보고 싶은 시절로 떠 오를지도 모르겠다.
한 가닥 붙잡고 싶은 시간의 지문, 공간으로 퍼져 나간 삶의 파동은 한없이 멀어져 우리의 감각을 뒤돌아보게 한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