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하다, 힘들고 지친다.

감정일기 8일차

by 가시나무둥지

정말 쉽지 않다.

한 인간을 인간답게 키워내는게 쉽지 않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컨트롤하는게 쉽지 않다.

늘 생각으로는 아이를 믿고 아이보다 반발자국 뒤에서 따라가는 정도의 개입만 해야겠다 다짐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사람마다 사랑의 그릇 크기가 다르다는 거 알고 있다. 그릇이 큰 아이는 더 큰 사랑을 갈구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사랑을 줘도줘도 줄줄 새어버리는 금이 간 대형 항아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요즘 쿠니의 행동이 또다시 과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관종이 되었다. 친구들과 놀이 중에 "재미없어. 맨날 술래잡기 아니면 숨바꼭질이잖아?"하고는 놀이에서 빠져버린다. 친구들이 다같이 와서 "쿠니야~ 같이 하자~"매달리듯 말해도 단호하게 "싫어." 이런다.

주장이 강한 다른 아이가 "야, 그럼 쿠니 빼고 우리끼리만 하자."이러면 조금 지켜보다가 자신이 소외되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또 어느순간 껴서 하다가 갑자기 안한다고 빠지는 것을 반복한다. 친구들은 그런 쿠니의 행동에 짜증을 낸다.


쿠니는 감정과 집중력의 기복이 심하다. 약으로 상당부분 잡아주고는 있지만 그래도 정작 집에서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저녁때 즈음엔 정말 기복의 정도가 심해진다.

그렇기에 매일 공부해야 할 하루치 공부를 표로 정리해 예상시간을 적어주고 실제로 몇분씩 걸리는지 적으라고 시킨다. 보통은 예상한 시간의 반도 안 걸린다. 예상 시간으로 적어둔건 모두 합해 1시간 30분 정도인데, 실제론 1시간도 안 걸린다. 그런데 요즘 급격히 힘들다고 짜증을 내기에 힘들면 공부 양을 줄이거나 몇개 빼라 해도 욕심 때문인지 뺄건 없다고 한다. 공부 학원을 안다니는 쿠니는 학원 숙제가 없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학습량을 비교해봐도 본인이 많지 않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어서 그 정도만큼은 꼭 하려고 한다.


맨발에 샌들을 신고 걸으면 샌들 속으로 모래가 가끔 들어간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매번 털어낼 수 없으니 적당히 참다가 모래가 너무 많아지거나 큰 모래알이 들어와 걷기 힘들 정도가 되면 신을 벗고 발을 턴다.

그런데 쿠니는 샌들에 모래가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저러다 다리뼈가 빠지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리를 흔들고 허공에 발길질을 한다. 저렇게 한다고 모래가 빠져나갈거 같지 않은데 아이는 두세걸음마다 그렇게 다리가 뽑혀나갈 정도로 흔들고 허공에 발차기를 해댄다.

"쿠니야.. 발에 모래 들어가서 불편하니?"

"네에에~" 짜증이 섞여있다.

"맨발에 샌들만 신으면 모래가 조금씩 들어가는건 어쩔 수 없어. 지금 엄마도 모래가 잔뜩 들어가있는데 매번 털 수 없으니 그냥 참고 걷는거야..그렇게 발로 허공에 차대지 말고 그냥 지압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좀 참아.. 그러다 정 아프거나 힘들면 그땐 아예 신발을 벗고 털어. 그렇게 허공에 발길질 하는건 별로 도움이 안돼."

들은체 만체다.... 여전히 허공에 발차기를 해댄다.

우리 둘만 있었다면 안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내 친구가 같이 있었다. 내 친구에게 오버액션을 통해 관심을 끌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모기에 물리기라도 하면 아주 난리가 난다. 간지러운데 긁으면 세균이 들어갈까봐 긁지 못하겠다며 간지럽다고 비명을 지르고 난리가 난다. 긁어도 괜찮다 해도 안된다고 난리다. 그래서 약을 발라주려 하면 늘 "아.아.아.아"하면서 약 바르기도 전부터 호들갑이다. 약 바르기 직전엔 무슨 약이냐며 빼앗아 확인부터 하려든다. (보면 니가 무슨 약인줄 아냐?) 엄마인 나를 믿지 못하는 모습에 짜증이 난다..

모기 물린거나 작게 다친 상처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는 6살짜리 비니와 비교되어 더욱 쿠니의 행동이 오버스럽게 느껴지고 솔직히 지친다.


어제 신랑이 회사에서 받은 세미나 중에 '비오는 날의 자기 모습을 그려보라.'는 부분이 있었나보다.

비니가 한참 공룡을 열심히 그리고 있는데 옆에 가더니 "비니야, 비오는 날 비니는 어떤지 그림으로 그려봐." 하는거다. 나중에 가보니 비니의 그림에 우산을 쓴 졸라맨이 그려져있었다.


신랑이 나를 불렀다. 그림 좀 하나 그려보라고.. 비오는 날의 내 모습을 그리라면서 졸라맨으로 그리면 안된다고 했다. 귀찮다고 왜 이런걸 시키느냐고 툴툴거리며 대충 그렸다.

heavy rain이냐 묻기에 "아니, 보슬비인데?" 그랬더니 "음...우산 잘 쓰고 있네.. 장화까지 신고? 얼굴은 웃고 있네?"

"난 원래 항상 스마일이잖아 아하하~"하고 웃었다.

신랑이 말하길, 오늘 세미나를 들었는데 비가 내리는 정도는 현재 스트레스 노출 지수란다. 우산이나 장화 등은 그 스트레스에 얼마나 스스로 잘 대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고, 얼굴 표정은 그로 인한 현재 심리 상태란다.

"뭐야? 그럼 나 보슬비 안하고 헤비레인으로 바꾸겠어!"라고 하니 신랑이 씨익 웃고 만다.

그러면서 본인의 그림은 아예 큰 천막을 치고 그 안에 앉아있는 우리 네 식구를 그렸단다. 비는 이미 다 왔다가 그친 상태였고 다들 밖을 보며 웃고 있는데 쿠니라고 생각하며 그린 아이만 찡그리고 있었단다. 왜 그렇게 그렸냐 물어보니, 그 상황에 자기가 왜 그렇게 그렸는지 모르겠단다.

한참 뒤 쿠니 방으로 신랑이 a4용지를 한장 들고 들어갔다. 아마 같은 그림을 그려보라고 한 모양이었다.

한참 뒤 종이를 가지고 나와서는 표정이 안좋다.

그 넓은 a4용지 정 가운데에 울상인 자기 모습을 그려놓고 비를 피할 도구를 아무것도 갖지 않은채 폭우 속에 있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보통은 비가 온다=우산을 준비한다 가 일반적인 생각인데 우리 쿠니는 달랐다.

남편은 쿠니가 밑빠진 독과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애정을 줘도줘도 늘 빠져나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나도 일정부분 동의한다. 참... 쉽지 않은 아이이다. 태어날 때부터 평생 사춘기 시절을 지내는 것 같은 아이. 세상이 오롯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주길 바라는 아이..

한편으론 이렇게 스트레스 많았나, 이렇게까지 스트레스에 취약했나 싶어 어떻게 해줘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남편과 대화를 하는 도중 남편이 갑자기 싸인펜으로 아이의 머리 위에 둥글넙적한 것을 네개 그렸다.

뭘 그리는지 궁금해 지켜보았다.

둥글넙적한 것에서 옆으로 길쭉하게 그려 팔이 되었다. 아이의 양쪽 얖으로 몸통이 두개 생기고, 머리와 다리가 각각 생겨났다.

남편이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비를 막아주면 되지...그러면 쿠니 얼굴도 웃는 얼굴로 바뀔 수 있을거야...."

그러고는 찡그리고 울상인 쿠니의 얼굴 위에 웃는 얼굴로 바꾸어 놓았다.

쿠니에게 얘기해줘야겠다. 하고 가서 쿠니에게 그림을 설명해주었다.

"비가 얼만큼 오는 거였어?" "엄청 많이요."

"근데 우산은 왜 안 썼어?" "몰라요.."

"이 비는 너의 스트레스를 나타내는 거래. 너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았니?" "네 맞아요. 요즘 너무 힘든데~ 자꾸 공부를 해야 하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았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공부를 줄일 수는 없으니까.."

"보통은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거나 해서 비를 피하는데 너는 아무것도 안 갖고 있다보니까 비를 흠뻑 다 맞네.. 스트레스를 네가 온전히 다 받고 있나봐." "맞아요! 나 스트레스 엄청 많이 받아요~!"

"그래서 표정보니 표정이 많이 안좋았어. 그렇지?" "네... 요즘 기분이 계속 나빴거든요..."

"그래서 여기 봐봐. 이거 아빠가 그린건데, 네가 직접 우산을 준비 못했으니 엄마랑 아빠가 너의 우산이 되어주려고 노력할게. 니가 비를 맞지 않도록 엄마 아빠가 널 도와주려고." "어어 그래요? 좋아요~^^"


솔직히 말해 사랑을 줘도 새나가는 느낌이 들 때마다 때때로 허탈하고 속상하다. 무기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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