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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May 11. 2020

밴댕이 소갈딱지

속 좁고 소심한 사람 이야기


밴댕이가 제철인 요즘 모 방송에서 강화 밴댕이 맛집 요리가 소개되었다. 보고 있자니 불현듯 10여 년 전 이맘때 강화도에 사는 대학원 동기의 초대로 가족들과 놀러 간 추억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당시 동기 녀석은 느지막하게 예쁜 새색시를 많나 공기 좋고 풍광 명미한 마니산 밑자락에 터를 잡아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갯벌도 있어서 아이들과 머드축제라도 온 듯이 신명 나게 놀다가 인근 밴댕이 회를 잘하는 맛집이 있다 하여 그곳으로 이동하였다. 평소에 회를 좋아해서 안 먹어본 회가 없었지만 밴댕이 회는 난생처음이었다. 맛깔스러운 초장을 듬뿍 찍어 상추에 싸 먹는 밴댕이 회 맛은 여느 회와는 색다른 맛이었고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비리지도 않아 아이들도 잘 먹었고 한 접시를 거뜬히 비웠다.

나는 밴댕이를 김치 담글 때 넣는 젓갈인 밴댕이젓 정도를 알거나 혹은 밴댕이와 관련된 속담 몇몇만 기억할 뿐이었다. 예컨대 ‘밴댕이 소갈딱지’는 속 좁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을 흉보는 말로 쓰이는 건 알았는데 왜 그렇게 얘기를 하는지 이유를 알지는 못했었다. 밴댕이는 다른 물고기와는 다르게 물에서 건져내면 뭍에 닿기도 전에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걸 예감이라도 한 듯 바로 죽는다 하여, 속이 좁은 사람을 빗대어 얘기한다는 것을 친구가 알려줘서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 그래서 밴댕이 소갈딱지라고 하는 거구나..'

그 말과 비슷한 의미로 소심하고 속 좁은 사람을 '트리플 A형'이라 말을 주로 사용했다. 혈액형이 A형인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소심한 편인데, 그중에 정도가 심한 사람을 트리플 A형이라고 일컬었다. 얼마나 소심하면 A가 세 개인 트리플이라 했겠는가!

밴댕이에 얽힌 사연은 나를 더 멀리 과거 철없던 학창 시절까지 기억을 끌고 갔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같은 학교에 다녔던 친구가 있었다. 고2 때 같은 반이 되었고 짝꿍까지 되고 나서는 무척이나 친하게 지냈다. 그 친구는 체구가 왜소한 나와는 달리 키가 크고 곱슬머리에 목소리까지 걸걸해서 또래 아이들보다 한참 나이 들어 보였다. 그 친구랑 다니면 경호원이나 건달을 곁에 두고 다니는 듯해서 호신술을 따로 익히지 않아도 될 만큼 신변이 안전했다. 심지어 저학년임에도 유급생처럼 보이는 그 친구의 노안 덕분에 선배들로부터 갈굼을 안 당하는 특혜를 누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에게 결정적인 흠이 있었으니 생긴 거와 걸맞지 않게 소심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교성이 좋은 O형, 그 친구는 소심한 A형, 아니 트리플 A형이었다. 또 하나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었는데 그것 말고는 특별히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한 번은 방과 후 농구장에서 팀을 나눠 농구를 한 적이 있었다. 경기에서 진 팀이 돈을 걷어 음료수 사는 내기를 했었다. 운동에는 젬병인 그 친구로 인해 경기를 아깝게 지고 말았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데도 자기 때문에 진 게 아닌가라는 소심한 성격에 의기소침하고 있었다. 그런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우리 팀한테 걷은 돈으로 슈퍼마켓에서 여러 이온음료와 과일음료를 섞어서 사 왔고 개 중에는 복숭아 캔음료도 있었다. 그리고는 취향대로 고르게 하고선 저 구석에 앉아 소심하게 자책하고 있는 그 친구한테 마지막으로 남은 복숭아 음료 캔을 건네주었다. 갈증이 났으니 확인도 안 하고 당연히 벌컥벌컥 마셨을 터.. 알레르기가 있다더니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그 친구는 자기가 마신 게 복숭아 음료라는 걸 알고 나자 순간 얼굴이 뻘게지더니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어라! 봉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더니 정말이었네?'

그 친구가 했던 말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알레르기가 심할 경우 호흡곤란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레르기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발적 행동도 아니고 계획적으로 골탕 먹이려고 장난을 친 거니 죄질이 나빴던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친구 아닌가! 기분 풀어주려고 했던 엄연한 장난인데 설마 내가 해코지하려고 그랬겠는가! 몇 번을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 친구는 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했던 내가 그랬다는 게 몹시 서운하고 배신감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화를 내며 욕을 하거나 어찌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냐며 머리를 한번 쥐어박거나 하고 풀면 좋으련만 꿀 먹은 벙어리처럼 꿍하고만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 친구의 혈액형은 트리플 A형이 분명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을 용서를 구하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뾰족한 방법이 없어 꼬여버린 감정의 실타래가 풀리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말 한마디를 안 했고 그 이후론 그 친구를 본 적도 없으며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의 생사 여부조차 알 길이 전혀 없었다. 생각 없이 친 장난에 소중한 친구를 잃은 셈이다.

밴댕이를 접하거나 복숭아 캔음료를 마실 때마다 그 친구 생각이 나곤 한다. 어디서 뭐 하고 살고 있을까? A형이 어울린다던 공무원이나 교수가 되었을까? 30여 년이 넘게 흘렀는데 아직도 그때 일을 마음속에 두고 있을까? 혹시라도 내 글을 우연히 접하게 된다면 서운한 마음을 풀고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다.

'친구야 미안하다. 그리고 정말 보고 싶다.'

그리고 행여나 그 친구를 만나게 된다면 떡 벌어진 어깨를 툭치며 한소리 해줄 참이다.

'어이구! 밴댕이 소갈딱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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