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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May 10. 2020

잔소리 유발자

잔소리를 즐겨라.


"여보! 볼일을 봤으면 물 좀 내려요!"
"양말을 아무 데나 벗으면 어떡해요!"
"집에 들어오면 손부터 씻으라니까요!"

아내의 잔소리가 여름철 모기처럼 귀에서 웽웽거린다. 엔들레스 테이프(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테이프)처럼 반복되는 레퍼토리로 끊임이 없다. 하루라도 잔소리를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 모양이다. 잔소리 종류도 참으로 다양하다. 양말을 뒤집어 벗지 마라. 라면을 끓이면 붇기 전에 빨리 와서 먹어야 한다. 베란다 문은 하루 종일 닫지 마라. 셀 수도 없는 잔소리, 잔소리, 또 잔소리.. 아내의 잔소리가 익숙해짐을 떠나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는지 간혹 은혜스러운 찬송가로 환청이 들릴 때도 있지만 이러다간 제명에 못 살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 한 번은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재밌는 글이 눈에 띄었다. <아내가 있어 오래 사는 이유>라는 글이었는데 내용인즉슨, 혼자 사는 남자보다 아내와 함께 사는 남자가 평균수명이 더 길다는 것이었다. 무슨 해괴측한 궤변인가 싶어 읽어보니 그 논리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남편을 잘 보필하기 때문일까? 아내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수명을 늘린다는 걸까? 첨엔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았으나 글쓴이의 주장은 전혀 예상 밖의 이유였다. 그는 물고기의 예를 들었다. 생선회를 파는 사람은 상어 한 마리를 풀어놓으면 된다. 그러면 물고기는 상어한테 먹히지 않으려고 열심히 피해 다닌다. 긴장상태의 물고기는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는다. 물고기가 수족관 내에서 일찍 죽는 이유는 긴장이 풀어져있고 제 맘대로 놀다 보니 운동량이 떨어져 일찍 죽는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가 상당한 타당성이 있기에 무릎을 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들의 처지도 마찬가지일 . 아내가 있으면 움직여야 하고 긴장을 하게 된다. 여성 상위 시대에 사는 작금(昨今)에 아내 때문에 긴장하지 않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남편이 조선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아내가 있는 남자는 평생을 긴장하고 움직일 태세가 되어 있기 마련이고, 나태해질 여유가 없으니 그 결과 남편의 수명은 자연스럽게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혼자 사는 남자는 긴장할 필요가 없다. 아무 때나 저 좋을 때 움직이면 그만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스트레스받느니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다고 솔로 예찬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의 일리 있는 주장에 나는 공감이 갔다.

그렇다. 아내가 있으면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한눈을 팔거나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던지거나 늦잠을 자거나 일거수일투족에 조심하지 않으면 아내의 잔소리는 바로 퍼부어진다. 아내는 게으르고 편안해지려는 남편인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수족관의 상어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고로 아내가 있는 나는 두뇌 노동자가 되어 오래 살 수밖에 없다. 아내의 잔소리는 내가 긴장을 놓지 않게 살도록 하는 좋은 장치인 것이다.

생각해보니 집사람이 친구들이랑 여행 간다고 며칠 집을 비웠을 때, 난 그 잔소리를 당분간 듣지 않는다는 해방감에 너무 좋아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생활은 엉망이고 금세 재잘거리는 아내의 잔소리가 그리웠었다. 잔소리는 나에 대한 관심의 또 다른 표현 방식 이리라..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라 하지 않았는가. 잔소리는 적어도 관심이 있다는 반증일 것이고 그것으로 내 존재감을 인정해 준 셈이니 감사할 일이다.

어쩌면 잔소리를 듣기 위해서 책을 읽고 그 책 저자의 잔소리를 실천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먼 길을 마다하고 찾는 스승도 결국은 그 잔소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닐까? 먼저 깨달은 분의 삶의 지혜를 잔소리를 통해서 듣는 셈이다.


나는 오늘 동사무소에 가서 잊지 말고 꼭 서류를 떼 오라는 아내의 부탁을 깜빡하고 못했다. 잔소리 들을 게 뻔하다. 아.. 그렇다면 내 수명이 조금 더 연장될 것이 아닌가. 아내의 잔소리 유발자인 나는 이런 추세라면 불로장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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