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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Jun 10. 2020

화해의 기술

부부싸움 해소 방법


집안에 적막이 흐른다. 벌써 이틀째 이러고 있다. 부부싸움을 한 탓이다. 아내는 단단히 삐쳐서 쉽게 풀 생각이 없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선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면 될 일이지만 이번엔 나도 지고 싶지 않아서 똥고집을 피우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숨이 막혀 못 견딜 거 같다. 내가 없는 사이 아이들까지 섭렵했는지 내가 완전 왕따 된 기분이다. 저녁에 애들하고 외식을 하기로 한 모양이다. 오늘 저녁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미나리 삼겹살을 먹으러 간단다. 아내가 보란 듯이 일부러 그 메뉴를 택한 거 같다. 근데 나한테는 일언반구도 없다. 치사하게 먹는 걸 가지고 복수를 하다니.. 짜증이 좀 나기 시작했다. 삼겹살에 백기를 들까 하다가도 유치하다는 생각에 그러지도 못하고 결국 화해의 골든타임도 놓쳐 버렸다.

부부란 본시 그런 것 같다. 별 시답지 않은 사소한 일로도 팽팽히 맞설 수 있는 상대가 부부인가 보다. 평소 서로 없어서는 못 살 만큼 닭살부부였다가도 아주 가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영영 안 볼 것처럼 원수가 되어 버리곤 한다. 고집을 피울 땐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밉기까지 하다. 그래서 부부를 무촌이면서 가장 먼 촌수 사이라고 하는가 싶다.

사건의 발단은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집에 오는 길에 노상에서 참외를 만원에 20개 한다는 팻말을 보고는 참외를 차에 실어 가지고 왔다. 참외를 평소에 좋아하는 터라 오랜만에 득템 했다고 좋아라 했는데 아내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여보 이런 거 사 오지 말라고요. 하나를 먹더라도 성한 걸 먹어야지요. 그리고 당신 말고는 나도 그렇고 애들도 안 좋아하는데 이렇게 사 오면 어쩌려고.."

나는 가성비 즉 가격 대비 양을 따지는 스타일이고 아내는 양보다는 질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아마 자라온 환경의 차이 때문일 텐데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매번 이렇게 부딪힌다. 아내는 당초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참외 몇 개가 곯아서 버려야 했다. 할 말이 없긴 했지만 옛날 얘기까지 들먹이며 구시렁거리는 아내의 핀잔을 듣는 순간, 나는 그만 감정이 울컥해져서 채신없이 그의 속물근성을 들먹이며 반격에 나섰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어찌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며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아내도 평상심을 잃은 듯 급기야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점입가경이 따로 없었다. 처음엔 단순한 견해 차이로 시작된 다툼이,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나비효과를 불러와 차츰 인신공격으로까지 증폭되어 갔다. 이 감정의 골이 메워지고 다시 종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상당한 자숙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도저히 화해의 접점이 보이지 않고, 서로 팽팽하게 대립할 때면 나는 백기를 들어야 하는데, 자존심이 있다 보니 대놓고 사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럴 땐 내 체면도 세우면서 화해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꺼내야 한다. 나의 비장의 무기는 이것인데, 처가댁을 아무 연락 없이 찾아가는 것이다. 다행히 집과 처가댁과는 1시간 남짓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처가댁 인근 마트를 들려 장인 장모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사들고 마침 이 근처에 일이 있어 왔다고 하고 들리는 거다.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가면 장모님이 몹시 기뻐하신다. 연락도 안 하고 왔으니 놀라움에 반가움은 배가 되는 건 당연지사. 격하게 나를 반겨주신다. 아내와 치열한 전쟁 중인 것도 모르고 애들 얘기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물으신다. 애들도 잘 크고 있고 집사람 하고도 아주 사이좋게 별 탈 없이 잘 지낸다고 에두른다. 장모님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장인어른 용돈도 챙겨드리면 막내사위가 최고라고 치켜세운다. 그리고는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하고 문밖을 나선다. 그러면 장모님은 저녁이라도 먹고 가지 왜 벌써 가냐고 서운해하신다. 또 들리겠다고 하는 사위를 아쉬워하며 보내고는 딸한테 전화를 하신다. 아주 가끔 써먹는 수법인데 효과는 항상 만점이었다. 처가댁을 다녀오고 난 그날 저녁은 집안 공기가 달라져있다. 그리고 절대 열리지 않을 철옹성 같은 아내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당신 심곡동(처가댁)에 들렸다면서요?"

"어.. 거래처 미팅이 있어서 가는 길에 잠깐 들렸지.."

"어이구.. 당신 좋아하는 찌게 해놨어요. 어서 씻고 식사하셔요."

아내가 하는 요리 중에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가장 잘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이 요리를 했다는 건 화가 풀렸다는 신호인 셈이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다. 나의 숨겨둔 화해의 기술을 사용할 내일 벌어질 가상 시나리오다. 늘 그래 왔던 패턴이라 크게 변수만 없다면 내 예상대로 될 것이다. 너무 자주 써먹으면 그것도 내성이 생기기에 효과가 없을 터. 하지만 내일은 오랜만에 그 수법을 써야 할 타이밍이 왔다. 숨 막히는 이 상황을 타개(打開)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했던가! 또 지는 게 이기는 거라 했던가! 선인(先人)들의 말은 하나 틀린 게 없는 듯하다.

내일 저녁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돼지김치찌개를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군침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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