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12살 막내하고 키를 재보니 부쩍 자란 듯하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많이도 먹어대더니만 근자에 덩치도 커진 거 같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이미 지 엄마보다 3센티는 더 크다고 자랑이다. 성인이 된 큰 아들도 어느새 나보다 훌쩍 커버려 우리 집 최장신이 되었다. 쑥쑥 자라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부모로서 흐뭇하기 그지없다. 엄마 아빠 종자는 그리 크지 않은데 품종 개량돼서 태어나 자라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여느 부모 마음이 같겠지만 '지 어미, 지 아비보다 낫네'라는 소릴 듣고 기분 나빠하거나 질투심을 느끼는 부모가 지구 상에 어디 있겠는가!
물론, 친딸을 15년 동안 성폭행을 하고 낙태도 시키는 짐승만도 못한 천인공노할 사이코패스가 간혹 불쑥 출현해 공분(公憤)을 사는 일도 있지만 정상적인 부모라면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자녀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 주는 건 부모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자 행복이지 싶다.
10년 전 일이었다. 직장동료들과 매달 첫 번째 토요일에 정기적인 봉사활동을 하곤 했었다. 그날은 굿네이버스라는 단체와 협력하여 용인지역에 있는 결손가정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하는 날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가정을 미리 선정하여, 2인 1조로 짝을 이뤄 굿네이버스 직원의 안내로 예정된 가정을 방문하였다. 내가 찾아간 곳은 허름한 단칸방에서 아빠와 아이들 셋이 옹기종기 살고 있는 집이었다.
당연히 집안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았고 고약한 냄새가 방안에 진동을 했다. 이런 데서 어찌 살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침대에 누워있는 갓 돌 지난 아기처럼 보이는 한 아이 때문이었다. 직원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 아이는 지금 10살 되었는데 선천적으로 왜소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고 그 정도가 심하여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신체나이가 한 살에서 성장이 멈춰있다는 것이다.
애들 엄마는 이런 삶의 고충을 견디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가출을 해버렸고 애들 아빠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찾아간 그날도 애들 아빠는 일하러 가고 집에 없었다. 누워있는 아이한테 다가가 손을 잡아주며 말을 걸었더니 눈을 깜빡거렸다. 말은 못 하지만 내 말을 알아듣는 거 같았다. 오랜만에 외부 사람을 보고 반가웠는지 눈가에 눈물을 보였다. 내 큰 아이와 같은 나이다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다.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뛰놀고 엄마 아빠한테 재롱 피우며 사랑받을 나이가 아니던가.
성장이 멈춘 아이...
흔히 어른들은 귀여운 자녀들이 너무 귀엽고 예쁜 나머지 더 크지 말고 이 상태로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복에 겨운 소리를 하곤 하지 않던가. 그게 얼마나 우매한 발상이란 말인가. 아마 성장이 멈춰버린 아이의 모습을 잠시라도 목격했다면 그런 소리는 다신 입밖에 내지 못 할 것이다.
불쌍하고 안쓰러운 마음을 잠시 뒤로하고 방문한 목적대로 화장실과 집안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도 해주었다. 청소를 마치고 잠시 다섯 살, 7살 된 아이들과도 놀아 주었다. 그리고 학용품과 생필품, 후원금을 전달해 주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하루 종일 그 아이의 잔상이 남아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내 마음을 내내 무겁게 했다. 그리곤 생각에 잠겼다. 성장이 멈춰있는 자식의 모습을 보는 부모 심정은 어떨까? 얼마나 마음이 미어질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때 기억이 잊히질 않는다. 아이들 아빠는 꿋꿋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어린 동생들은 잘 크고 있는지, 그 아이는 살아있는지, 그때 일을 떠올리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리대로 성장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를 깨닫게 된다. 또 한편으론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아이의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오래도록 가깝게 지내는 회장님 한분이 계신다. 젊을 때부터 명동에서 의류사업을 하여 성공하신 분으로 하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원 없이 누리면서 사셨던 분이셨다. 그러나 뵐 때마다 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그 이유는 큰 아들이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멀쩡하나 사회적으로 소통하는데 장애가 있다.
아들이 마흔이 다 돼가는 데도 자립을 아직도 못하고 있으며, 대인기피증으로 집 밖을 나서지 않는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상태가 심각해서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켰다며 속상한 나머지 울먹이셨다. 왜소증으로 육체적 성장이 멈춘 아이나 몸은 다 컸지만 내적으로 성장하지 못해 성인아이로 머물러있는 자식이나 부모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건 매 한 가지일 것이다.
인간은 지구의 자전을 하루라고 하고 또 지구의 공전을 일 년이라고 한다. 그걸 통틀어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하고 달력을 만들어 사용한다. 또한 연속된 시간의 흐름을 세월이라고 한다. 모든 만물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장은 외적 성장뿐만 아니라 내적 성장도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만큼은 그래야 한다.
신체적 성장과는 달리, 정서적으로 부모에게 상처를 받았던 어린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성인이 되어서도 가지고 있는 모습이 바로 '내면 아이(inner child)'라고 한다. 신체적 발달과 달리, 정서적 발달에 있어서 강압적인 부모와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랐던 사람은 공포스럽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지 못한 채 몸만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 유치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 큰 어른임에도 어려서 받지 못했던 사랑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성인아이인 것이다.
나잇값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적 성장의 모습을 보인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하여 유치한 말과 행동을 보인다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유치한 정치인, 유치한 종교인, 유치한 경제인, 유치한 예술인 등 한마디로 유치한 어른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판치는 세상인 듯하다.
내 자녀들이 나보다 키가 커가는 것만큼 내적으로도 나보다 더 성숙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보다 더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나이를 먹어갈 때마다 아비보다 나잇값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 준다면 내게 있어 아이들이 키가 자람을 보는 기쁨만큼이나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