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부산이 좋다. 아직 춥다고 느낄 때 서울을 떠나 부산에 내리면 뭔지 모를 따스함이 있고, 서울 공기가 너무 탁하다고 느끼며 출장을 위해 향한 부산은 언제나 푸른 하늘로 맞아 주었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부산에 살았다. 7남매를 낳고 키우느라 폐가 나빠지신 엄마를 배려해 아빠는 당시 전원주택지 개념이었을 남천동에 2층 집을 지으셨고 염소와 야채들을 직접 키울만한 텃밭과 마당도 마련하셨다. 엄마랑 쑥 캐고 깻잎 뜯던 기억, 아침마다 함께 무화과 열매를 빨간 바구니에 따서 모으던 추억은 어떤 유산보다 내겐 값지다.
여름이 되면 멀지 않은 거리의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쉬러 갔다. 수영을 딱히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모래와 바다와 수평선 그리고 갈매기들과 어우러져 긴 시간을 보냈다.
직장을 잡고 첫 출장지는 부산이었다. 대사님을 모시고 조선 비치에서 하는 큰 행사를 준비하고 치르며 의전에 통역까지 해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이번 출장의 성과가 앞으로 내 커리어와 직접 연관될 거라는 중압감도 컸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해운대 백사장의 커브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큰 창을 가진 이렇게 좋은 곳에 묶는 것으로 여독과 일 스트레스는 상쇄되었고 서울로 올라가는 날 조찬회의 보다 2시간 전에 일어나 30분 정도 동백섬을 산책하거나 큰 수건을 가지고 나가 모래사장에 깔고 해를 토해내는 수평선을 보고만 있어도 힐링 그 자체였다.
그리고 2006년, 독일에 살고 있는 둘째 언니네가 한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근무지는 부산! 그 후 언니가 다시 독일로 돌아갈때 까지 약 7년간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기회만 되면 아이들과 부산을 찾았다.
그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독일 언니가 부산으로 발령받아 오신 첫해 여름, 2006년. 큰아이는 초등 저학년, 둘째는 아직 많이 어리다. 바쁜 남편도 시간을 내어 함께 했다. 언니랑 형부가 독일 집으로 휴가를 간 사이 우리는 바다 전망이 좋은 둘째 언니의 센텀 집에서 지내면 된다. 해운대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조선 비치호텔 가까운 곳에 파라솔을 빌리고 아이들은 모래성도 쌓고 물장구도 치면서 잘 논다. 물론 바다에서는,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이들에게서 눈을 뗄 수는 없다.
해운대에서 즐거운 여름 깔깔깔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한참 아이들이 놀고 잠시 휴식하는 동안 애들 보느라 눈이 빨개진 남편이 수영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실내수영장이 아니니, 또 여벌 옷도 준비돼있으니,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도 바닷물에 들어가는대는 상관없다. 애들이랑 나는 음료수 마시면서 쉬고 아빠 올 때까지 모래성을 쌓으면서 잘 놀았다. 이제 곧 저녁식사 시간. 수영을 마친 애들 아빠가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흠찟 당황하는 모습. 어머 이걸 어쩌나, 반바지에 넣어둔 자동차 열쇠가 잠시 수영하는 사이 빠져 버린 것이다. 아마 전자키가 아니고 쇠로 만든 열쇠여서 물에 닿는 것에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모래사장이랑 아빠의 동선을 따라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나올 리가 없었고 그 와중에 아이들에게 '잔솔밭에서 바늘 찾기'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며 웃지 못할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렇게 당황스럽고 걱정되는 시간을 보내던 중 둘째 아이가 너무나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바닷물을 다 빼버려요!" 집에서 목욕탕 물을 빼는 마개를 열면 물이 빠지고 목욕통 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 둘째, 걱정하는 엄마 아빠를 위해 너무나 멋진 아이디어를 내주었네. 내딸 스케일 최고!
정말 그때 해운대 바닷물 다 빼고 자동차 키 주어서 들고 유유히 걸어 나와 가뿐히 자동차 시동 걸고 저녁 먹으러 가고 싶었다.
"바닷물을 빼면 바닥에 열쇠가 있지 않을까요?" 아이의 눈이 너무나 맑고, 목소리가 진지해서 그건 좀 쉽지 않겠다는 설명을 어디서 시작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해운대 바닷물을 다 빼고 해운대 해수욕장을 없애는 것으로...
애들 아빠는 다행히 형부가 알려준 비상열쇠의 보관 장소를 알고 있었고 멀지 않은 언니 집에 신속히 다녀와 그날 저녁 스케줄도 무리 없이 마무리되었다. 물론 다음날 아침 자동차 여분의 열쇠를 복사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크고 작은 추억이 많은 부산. 내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다. 아이의 기발한 제안으로 없어질 뻔한 해운대 해수욕장에 올해는 코로나를 뚫고 꼭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