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2-3년 앞서 내 자녀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아들 딸 키우는 친한 친구가 딸에 대한 걱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내게 말해줬다.
"딸하고 엄마 사이는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고 보면 돼. 사흘은 춥고 나흘은 따뜻하지.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을 받는 우리나라 전형적인 겨울 날씨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딸이랑 엄마랑 둘이 진짜 좋아서 뭘해도 신나고 그럴 때 있잖아. 뭘 같이 먹어도 다 맛있고 요거 시험만 끝나면 같이 여행 가고 싶고 함께 목욕탕 가고 싶고 요거 없으면 어떻게 사나 싶을 때 그때는 따뜻한 사온(四溫)의 시기지. 하지만 모든 게 엄마 탓, 오히려 나 때문 애가 기를 못 펴나, 내가 너무 모르나. 뭘 사줘도 던져버리고 싶고 그럴 때 그때는 삼한(三寒)이지. 아주 춥고 살벌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겠거니 하고 조금 기다려야 돼. 다시 따스해지는 패턴을 믿고.."
그 말을 듣고 나서는 어쩐지 아무리 짜증 나는 소리를 들어도 말도 안 된다 싶은 억지를 들어도 쌩쌩 찬바람이 불어도 정신이 그전처럼 사납지는 않다. 내 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 한 구절 소리 죽여 입으로 속삭여 읽으며 숨을 고르고 기회가 되면 살짝 산책을 가거나 근처 마트에 다녀온다. 돌아올 때 편안해진 내 마음과 함께 입맛에 맞는 먹거리를 조금 보여주면 대개는 맘이 풀리고 서서히 사온의 시기로 돌아온다.
2월 마지막 주 못 봤던 드라마를 딸과 함께 정주행 하며 과자도 먹고 간식도 먹고 알콩달콩 잘 지냈다. 하지만 오디션이 코앞이고 계속되는 코로나와.. 그 질풍노도 시기인 열아홉고민의 무게를 말로 어떻게 할까. 어쨌든 오싹한 삼한의 시기가 어젯밤에 찾아왔고 비 오는 3.1절.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내 할 일을 하다가 기회를 봐서 잠시 바람을 쐬어야 한다. 여러 장소를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백화점이 먹거리 사기도 좋고.. 서울로 7017을 이용해 도보로 가길 좋아하지만 비가 꽤 많이 와서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오전 11시 정도인데도 주차장으로 진입하려는 차가 길게 두줄이다. 오늘은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일을 좀 하려고 노트북도 챙겼다.
지하의 푸드 코트에 가려니 벌써 사람들이 많고 노트북 들고 식판 들고 하기엔 아침 거른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 일단 본관으로 갔다가 식당가의 펜트하우스 같은 6층 까사빠보에서 혼밥 하기로 했다. 11시 반 조금 안되어 빈자리가 듬성듬성 보였고 테이블이나 창가 바 자리 중 좋으신 곳에 앉으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을 보고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에 무거운 노트북 가방을 올렸다. 이게 얼마만인가 까사빠보...
사실 이곳에서의 식사는 오늘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름은 너무나 익숙하고 몇 년 전 퇴직하고 풀타임 엄마 노릇을 시작하고 가끔 백화점 식품코너에 올 때 언젠가 직접 밥을 먹어봐야지 생각만 했던 곳이다. 까사빠보의 이름이 익숙한 것은 딱 30년 전, three decades ago!, 그러니까 1991년 직장 들어가서 처음 치른 큰 프로젝트인 신세계 호주 물산전에서 호주 쇠고기 프로모션을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캔 던 Ken Done 전시회, 그의 부인 주디 던 Judy Done의 패션 미팅, 언론홍보와 TV 인터뷰 등 20대 초반인 새내기에게 맡겨진 일 치고는 꽤 비중이 있었기에 부담감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면서 열심히 준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준비했던 언론사 배포 자료에 "까사빠보에서의 호주 쇠고기 이벤트"라는 문구가 있었고 Ken Done, 그리고 당시 호주대사였던 데른 그리블 Darren Gribble의 통역 때 그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어야 하였기에 기억에서 잊히지가 않은 것이다.
1991년 3월에 일 때문에 알 게 되었던 그 식당에 2021년 비 오는 3.1절 아점을 먹으러 혼자 앉아서 음식에 집중하지 않고 까사빠보 자체에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은 계산서를 담아주는 커버에 CASAPAVO 1971, 1971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올해로 50년이 되는 식당... 서울에 몇 개나 될까? 그리고 그 이름은 누가 지어주었을까? 50년 동안 정말 같은 자리에 있었을까? casa는 집이라는 뜻일 테고 pavo는 무슨 뜻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창밖에 펼쳐진 트리니티 가든 중심에 자리 잡은 헨리 무어 (1898-1986)의 '와상:아치의 다리 (Reclining Figure:Arch Leg)'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이렇게 쉬는 것도 참 감사한, 근사한 일이라고 느꼈다. 30년전 일할 때는 맛보지 못했던 호주산 쇠고기를 갈아 만든 함박스테이크와 조개로 진하게 끓여낸 장국을 리필까지 해서 남김없이 맛있게 먹으니 애기들 돌아볼 힘이 또 생겼다. 사실 아그들은 내가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그들 덕에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도 더 선명하게 들어왔다.
까사빠보의 창가 자리에서 보이는 트리니티 가든과 조각품들 (헨리 무어의 '와상:아치의 다리', 안토니 곰리의 "Think', 그리고 루이즈 부르주아의 'Eye Benches)
며칠간 장염인지 독감인지 힘을 못쓰던 큰애가 뜨끈한 게 먹고 싶다고 전화를 해서 나는 출동 명령을 받은 군인처럼 다시 각을 잡고 뜨끈한 국물이 좋은 하동관에 전화를 했다. 진입하는 길이 3.1절 차량시위로 쉽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2인분 포장을 받아서 무사히 귀가. 뜨끈하게 끓여주니 유치원 때 먹던 것처럼 큰아이가 맛있게 먹는다. 이렇게 가까이서 아프던 바쁘던 가끔 밥 먹는 거라도 보게 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생각뿐이다. 밤낮이 바뀌어서 오전 10시 지나 잠이든 우리 딸 깨어나면 곰탕 먹고 몸도 마음도 풀리기를...
비 오는 3.1절 아침 삼한(三寒)의 까사빠보. 삼한사온 중 삼일간의 추위를 피해 찾은 '공작새의 집'이라는 뜻의 까사빠보(Casapavo). 30년 전 열심히 일했던 기억이 내게 새로운 힘을 준다. 계산을 하고 뒤돌아본 트리니티 가든의 조각상들이 빗소리와 함께 내게 말을 건다. 가끔은 춥고 가끔은 황량해도 그 자리에 그냥 있어. 그것으로 충분히 근사한 거야.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예술이고 사랑일 때도 있어. 걱정 안 해도 때가 되면 공작새처럼 눈부신 날개를 펼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