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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이모 Apr 11. 2021

88년도 8만원의 기적

주경야독 피곤한 청춘에게 주어진 기적 같은 1년

대학은 내 몫이 아니라 생각했다. 7남매 막내, 이미 많은 고생을 하신 신실하고 사랑 많으신 마미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았다. 고졸 여사원으로 '수출 전쟁' 이 선포된 종합상사에서 19세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선배 언니의 소개로 운 좋게 직장을 옮겼다. 야간 대학을 다닐 수 있도록 5시 퇴근을 보장해 준 이곳은 강남에 위치한 미국과의 조인트 벤처. 미국인 엔지니어 비서가 나의 일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미국의 오피스 아워가 오후 5시까지이니 특별할 것 도 없는데 종합상사에서 별이 떠야 퇴근하는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정말 아직 대낮같은 5시에 가방 메고 퇴근할 때의 상쾌함이란!  어쨌든 퇴근 후에는 직장에서 1시간 더 걸리는 거리의 야간대학교로 달려가서 책을 폈다.  


집에서 직장까지 1시간 반, 직장에서 학교까지 1시간 다시 직장에서 집까지 1시간 반 이상, 이렇게 이동거리 매일  3, 4시간, 직장 근무시간 8-9시간, 야간대 공부 5-6 시간으로 이동 시간과 수면시간을 공집합으로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도 학교에서 배운 것이 직장에서 활용되고 직장에서 느낀 문제점을 학교에서 되짚어 보고 기존의 연구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즐거웠다.


당시 내가 가장 부러웠던 부류는 돈에 구속받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시간을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학생들이었다.  내 몫이 아니라고 여긴 대학생이, 비록 야간이지만, 되었는데 뭘 더 바라랴. 나는 열심히 기억도 기약도 없이 치열한 시간들을 보냈다.


서울을 세계무대로 올려놓은 첫 메가이벤트 (Megaevent) 라고 할 수 있는 88 서울 올림픽을 한해 앞두고 나는 올림픽에 자원봉사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내게는 범접할 수 없는 아주 먼 세계로 보였다.  당시 쓴 일기를 보면 얼마나 많은 밤들을 그 피곤한 중에도 미래의 더 성장한 나를 위해 지금 직장을 버리고 2년 남은 대학 생활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 한가득이다. 그것을 위해 인터넷도 없던 시절 신문, 잡지, 발품을 팔며 여러 군데 문의도 하고 좀 더 시간이 자유로운 그리고 페이가 좋은 직장을 찾으려고 또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어떤 길이 있을지 적어 놓은 전화번호 번호와 메모가 노트 몇 권이다.


그런 메모 중에 올림픽 자원 봉사자 모집에 대한 내용도 있다. 혹시나 하고 나는 지원하였고 운 좋게 시상식과 개폐회식 통역 자원봉사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직장...  어떡하지 고민에 걱정에 위경련까지 왔다.  야간만이 아닌 낮에도 대학생활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있는데 당시 싱가포르에 거주하셨던 셋째 언니가 주경야독 고생했는데 겨울방학 때 와서 영어 공부도 하고 조금 쉬라고 했다.  당시 1년에 휴가 3일을 쓰는 것도 전사적인 배려가 필요했을 때라 나는 조심스레 직장을 나와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올랐다.


뜨겁고 습한 싱가포르에서의 겨울방학을 보내고 학업은 마치는 게 좋겠다는 언니 말씀을 따라 2월 말에 귀국했다. 또 알바와 직장을 알아보려는데 셋째 언니가 무심한 듯 국제전화를 걸어 말했다.


'올해에는 올림픽이 열리니까 자원봉사 열심히 하면서 대학 생활에만 집중해 봐'.  어?  내 꿈속에 왔었나?  내 마음을 어떻게 알지? 하지만 등록금도 벌어야 하고 생활비도.. 도저희 내게는 너무 먼 일인데...   언니의 말이 이어졌다 "부산 사는 ㅇㅇ 언니 알지? 이번에 집 살 때 필요하다해서 돈을 조금 융통해 줬는데 한 1년 정도, 한 달에 8만 원씩 이자 받기로 했어.  연말까지 그 이자 네 통장으로 넣어 줄게.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해'.  아,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 생각을 하면 마음이 떨리고 감동된다.  먹고사는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다니!


그렇게 88년도에 매달 8만원의 선물이 찾아왔고 그해에 20대 초반으로써 경험한 올림픽 자원봉사와 단기, 장기 통역, 사무 알바들, 그리고 학교 공부와 영어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1년의 시간은 나중에 워라벨이 그래도 잘 지켜지는 든든한 직장을 구하고 또 야간이지만 대학원에서 석사를 받으며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단단함의 초석이 되어 주었다.


브랜드도, 맛집도 잘 몰랐던 나에게 최저 식비와 교통비 외에 더 필요한 건 없었고 언니가 배려해 준 매달 8만 원의 장학금이 내 20대 초반 1년의 시간을 근로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다.  올림픽 자원봉사를 가면 매번 4,000원의 교통비도 지급되었고,  유니폼과 함께 지급되었던 랜드로버 단화는 내가 처음 신어본 비닐이 아닌 진짜 가죽으로된  신발이었다.  봉사를 가면 머리도 해주고 메이컵도 해주고 때때로 교육도 해주고 같이 봉사하는 팀원 중에는 미주지역의 교포 2세들도 많아서 여러 경험을 가진 친구들 만나는 재미도 솔솔 했다.  금수저 같은 그분들도 내가 머리 스타일을 바꾸거나 아이쉐도우 색깔을 바꾸면 '어 헤어 바뀌션네요,   아이즈 색깔 예뻐요' 하며 관심을 보여 주었고 당시 동구 공산권에서 온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새로웠다.  


올림픽 공원, 시상식팀 해단식


그렇게 1년을 '근로'에서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보내고 이제 4학년, 언니 친구분이 빌리신 돈은 약속된 시간에 상환이 되었고 이자로 받았던 장학금도 끊겼다.  하지만 그 1 년간 내 의지대로 보낸 치열하고도 자유로운 시간이 없었더라면 나는 계속해서 그 조인트 벤처에 근무하거나 (어쩌면 이사가 되었을까?) 가보지 못한 길들을 기웃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언니께 이렇게 수십 년 전에 제게 8만원씩을 주셔서 제가 맘 편히 공부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내가 미안해할까 봐 그러셨는지 정말 기억에 없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때 언니가 준 8만원은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동생이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세워져 가는 과정에서 너무나 중요한 거름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고맙고도 놀라운  8만원의 기적,  앞으로 이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되고 싶다고 새로운 꿈을 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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