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 이모 Jul 30. 2021

복숭아 갈비

어렸을 때 몸이 약했던 나는 겨울이 시작되면 한차례씩 열이 나고 아팠다.   그때마다 아버지께서 복숭아 통조림을 사다 주셨다. 차가운 겨울날 달고 시원한 맛에 열나는 것도 잊고 눈을 반짝이며 맛나게 먹고 한잠 자고 나면 다시 뛰어놀 수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한참 복숭아 통조림을 먹지 않았다. 중학생이던 나는 대신 복숭아 통조림을 사 오실 때 입고 계셨던 아버지의 검은색 가죽 잠바를 입고 다녔다. '에리"라고 불리던 하얀 삼각형 칼라에 검정 투피스 교복,  쏟아질 듯한 앞머리를 검정 실핀으로 삐쭉 고정시킨 귀밑 1센티 단발머리, 뼈가 보일듯한 팔다리를 누가 봐도 성인 남자의 꽤 오래 입은 가죽 잠바, 아버지의 옷을 방패 삼아 그 겨울을 지냈다.  나프탈렌이나, 포마드 같은 냄새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타인의 눈으로 그때 교복 위에 허름하고 커다란 가죽 잠바를 입은 빼빼 마른 여중생을 만난다면 참 안쓰러울 것 같다.


그 겨울 이후 복숭아에 두드러기 반응이 생겼다.  먹는 건 고사하고 만지면 털 때문에 온몸이 붉어지고 간지러워서 근처에 있는 것도 싫었다.  냄새도 싫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나오는 복숭아 알레르기를 이용한 집사 내보내기 작전은 영화 중에 가장 리얼리티가 높다고 느낄 정도로 한때 나는 복숭아와 담을 쌓고 살았다.


복숭아를 다시 먹게 된 것은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부터다.  한. 일 월드컵 열기가 뜨겁던 광화문.  워킹맘이던 나는 당시 같은 부서에 고향이 이천이고 부모님께서 아직 복숭아 농사를 짓는 동료가 있었다.  K대에 교환학생으로 온 호주 여학생과 캠퍼스 커플이 된 인성 좋은 분.  인심도 좋아 부모님이 수확한 복숭아 맛보라고 회사에 몇 번 가지고 왔다. 회사 탕비실에서 나누어 먹은 큼직하고 물이 뚝 뚝 떨어지는 백도와 황도는 어쩐지 달기만 하고 옛날 같은 가려움은 선사하지 않았다.  한두 개 집에 가져와서 나누니 어머님도 맛있다고 하셔서 그해 여름에 계속 주문해서 먹었는데 아마 혼자서 다섯 상자는 먹은 것 같다.


그 이후 해마다 첫 복숭아를 만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크고 좋은 복숭아를 찾아 주말에 두 세 군대 마트, 한살림, 백화점을 돌기도 했다.  그리고 날씨가 시원해지기 시작하면서 복숭아가 들어가려고 하면 어떡해서든지 오래 먹고 싶어서 상자째 냉장고에 보관도 해보고 키친타월에 싸서 밀봉 포장도 해 보며 오랫동안 복숭아의 맛을 느끼려고 했다.


복숭아는 언제 먹어도 맛있지만 갓 따서 3일에서 5일 내에 먹는 것이 좋다.  흐르는 물에 씻고 식초물에 다시 헹궈서 껍질을 손으로 벗기고 씨를 중심으로 양옆을 자르면 커다란 보름달이 두 개 나온다.  그리고 남은 부분을 자르면 보름달의 반(half)만 한 좁은 부분은 타원이고 긴 부분은 직선인 복숭아 조각이 나온다.  이렇게 복숭아 한두 개를 잘라 큰 접시에 놓으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요즘 말로 순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냠냠, 28cm 원형 접시에는 금방 약간의 과즙만 남는다.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그런 시절을 보내던 나는 복숭아 맛을 씨를 둘러싸고 있는 과육으로 느꼈다.  보름달 두 개와 그 반 한 조각으로 잘린 과일을 접시에 예쁘게 담고 씨를 버리기 전에 씨에 붙어 있는 과육을 칼로 더 도려내거나 아니면, 주로, 입으로 가져가 갈비처럼 뜯게 된다.  이름하여 복숭아 갈비!  못 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 본 사람은 없다는!  보기에는 좀 우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맛은 좋다.  손에 묻힌 김에 그렇게 복숭아 갈비를 두세개 먹고 나면 벌써 배가 부르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평소에 배우고 싶은 강좌를 조금씩 듣게 되면서 올여름부터는 복숭아 갈비를 뜯지 않게 되었다.  시간적 여유도 생겼지만 아이들이 바쁘니 복숭아를 예쁘게 썰어 줄 일이 별로 없다.  그냥 하나 껍질을 벗기면 내 입맛에 맞게 잘라먹으면 된다.  굳이 씨 옆의 과육을 입으로 돌려 깎기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칼로 예쁘게 작은 조각으로 잘라내어 접시에 담아 먹으면 된다. 지금 까지 뭐가 그리 바쁘다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신을 대접하지 못하고 과즙을 뚝뚝 묻히면서 쓰레기통 들어가기 직전의 복숭아 씨를 싱크대 앞에서 뜯고 있었는지.. 뭐가 그리 아깝다고....   


그렇게 태도와 자세를 바꾸어서인지 요즘 참 호강이다.  꿈을 위해 본인만의 다이어트 방법을 실천 중인 딸아이가 하루 두 끼를 직접 요리를 해서 함께 나누는 중!  처음에는 그게 가능할까 했는데, 유튜브와 오랜 기간 다양한 검색과 노력의 결과 알게 된 지식과 간접 경험으로 정말 훌륭한,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건강에도 좋은, 식당을 열어도 잘 될 것 같은 건강 다이어트 식을 뚝딱 잘도 만든다.  요리기구도 인터넷으로 저렴하면서도 편리한 것을 장만했고, 식자재도 원산지, 성분 다 따져서 꼭 필요하고 순수한 것으로 잘도 구해 온다.  덕분에 나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매일 예쁘고 맛있는 건강식을 대접받고 있다.  정말 몸도 가볍고 속도 편하다.


지난주에 용인 쪽에 다녀오다가 올여름 처음으로 복숭아를 상자채 샀다.  3kg 상자에 7개 들은 것이니 꽤 알이 크다.  그날도 딸내미 표 '가지 라자냐'를 맛있게 먹고 오랜만에 디저트를 먹기로 했다.  땀 흘리며 식사를 힘들게 만든 딸아이가 복숭아도 준비해 준다고 한다.   엄마는 그냥 앉아 계시라고 하도 그래서 좀 미안하지만 식탁에 앉아 무심한 듯 핸드폰 보며 고개를 숙이고 모른 척 기다리는데 '금방 됩니다' 하는 말에 딸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조리대 한편에 복숭아를 먹음직스럽게 썰어서 담아 놓고 딸은 등을 보인채 급하게 복숭아 씨를 물고 있었다.   씨에 붙은 과육을 입으로 베어 먹고 있는 것이다.  아.  아이들이 내가 등을 보이고 씨앗에 붙은 과육을 먹거나, 남은 음식이 아깝다고 숟가락으로 긁어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았을 때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특히 우리 둘째.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힐 것 같던 아이인데...  언제 내가 복숭아 갈비 뜯는 걸 봤던 것일까?  예쁘게 준비해 주어도 조금만 입에 안 맞으면 남기고 버리던 아이인데...  싱크대에 서서 복숭아 갈비를 뜯다니.


순간 내 마음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껍질 벗긴 복숭아처럼 물컹해졌다. 나는 아이랑 눈도 못 마주치고 식탁과 가까워지는 과일 접시만 바라보았다.  아이는 미소가 묻어나는 예쁜 목소리로 "엄마, 보름달 드세요~" 아직 물이 묻은 손으로 내 앞에 놓는다.  하얗기도 하고 연분홍 이기도 한 커다란 보름달 두 개가 초록 테두리의 아이보리 색 웨지우드 접시 위에서 활짝 웃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시인 김현승의 눈물, 그리고 가을의 기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