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가슴의 상처를 믿음으로 달래고, 그러한 심정으로 썼다. 인간이 신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변하기 쉬운 웃음이 아니다. 이 지상에서 오직 썩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일 것이다".
김현승 시인이 '눈물'이라는 시를 쓰고 그에 대해 하신 말이라고 한다. 시의 후반부는 이러하다.
...
흠도 티고,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지상에서 오직 썩지 않는 것,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 그 눈물을 담은 김현승의 시어는 어쩐지 슬픔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화려하고 복잡한 시내 한가운데서 느끼지도 알지도 못했던 깊고 다중적인 나의 상처들을 조용히 치유해 준다.
소리 내지 못하고 흘린 눈물, 눈앞이 어두워져 눈꺼풀을 감았다 떴을 때 주르륵 흐르는 눈물, 배게 가 축축해서 그재서야 내가 울었구나 알게 된 눈물, 목이 막히며 그 응어리가 갈대 없어 쥐어짜듯 나오는 눈물, 아름다운 것을 볼 때 나도 모르게 맺혔던 이슬 같은 눈물, 존재 조차 모르고 말라간 눈물까지 모두 나를 살려주고 신에게 바쳐진 값진 것이라고 시인은 말해준다.
나를 품었을 때 흘리셨을 어머니의 눈물을 어찌 내가 가름하며, 기억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흘렸을 태어나는 순간 내가 흘린 눈물을 어찌 잊고 살 것인가. 돌 같은 마음에 눈물의 습이 들어가면 찰흙처럼 부드러워져 찻잔도 만들고 연필통도 만들 수 있다. 유약을 바르고 일상에서는 생각도 못하는 높은 온도의 가마에 구워지면 천년을 가도 변치 않는 청자, 백자, 분청 같은 도자기가 탄생한다. 하지만 그냥 말리면 좋은 날씨에는 모양이 유지되어 마른 것을 담는 통으로 쓸 수 있겠으나 물이나 음식 같은 수분이 있는 것이 닿으면 금방 그 형태는 찌그러 지고 만다. 눈물로 마음이 부드러워졌을 때 나는 간단한 형태 변경만 할 것인지 숨 막히는 가마의 뜨거운 불길을 통과할 것인지 혹 내가 선택할 수 없다 해도 주어진 길을 겸허히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6년 전 SJA에서 주말에 작곡을 배웠을 때 숙제의 하나로 김현승 님의 시에 곡을 붙였다. Muse Score로 악보도 그리고 시인에 대한 자료도 찾다가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오랜만에 글 읽다 울었다. 중, 후반부는 이러하다.
...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깨끗한 피로.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을 읽으면서 윌리엄 워즈워스 (William Wordworth 1770. 4. 7. - 1850. 4. 23)의 무지개에 나오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다'라고 한 부분에서 특히 그렇다. 그리고 어린것들이 간직한 깨끗한 피로 항상 씻김을 받는 아버지의 때... 이것이 어찌 아버지의 때 뿐이랴. 어른의 아버지인 어린이, 아버지의 나라이며 아버지의 동포인 어린것들 그리고 어린것들이 간직한 깨끗한 피... 그 덕분에 나라도 있고, 동포도 있다.
마음이 저려온다. 아버지의 동포인 어린것들, 어른의 아버지인 어린이들의 마음에, 목소리에, 몸놀림에, 그 표정에, 그 옹아리에 조금 더 귀 기울인다면, 아니 그 눈망울을 경쟁의 사심 없이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의 조바심 없이 그저 잠시 바라봐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16년 11월 19일 숙제는 해야 하는데 아이디어가 없어 아이의 동시집을 뒤지다가 보게 된 가을의 기도. 어쩐지 여름에 읽으니 더 와닿는다. 아니, 숙제를 해야 했던 때로부터 세월이 흘러 내가 더 깊은 가을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와닿는 것 같다.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꽃이 피는 계절이 아닌 낙엽 지는 때를 기다려 주신 겸허한 모국어. 그런 모국어로 꽉 채운 기도를 해야 한다. 가을에는.
1956년 '문학예술 4월호'에 실린 김현승 님의 가을의 기도. 60년이 지난 2016년에 나는 그 기도에 간단한 곡조를 붙였다. 숙제로 내고 가끔 혼자 피아노로만 쳤다. 그리고 5년이 더 지났다. 오늘 처음으로 나 아닌 사람이 그 곡을 연주해 주었다. 가족 아닌 사람 중 처음으로 들어준 1인도 있다. 아름다운 곡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이제 시작이다. 그래도 머리로 생각만 한 게 아니고 일단 악보를 써 놓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쓰고 보자.
얼마전 아이에게 들었다. 한 영상에서 이어령 님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을 겪은 할머니 세대는 피의 세대, 경제개발을 위해 일만 했던 그 다음은 땀의 세대, 그리고 지금의 10대 20대는 눈물의 세대라고 칭했다고 한다. 샌드위치 세대라고, 위로 아래로 부담이라고 불평도 했지만 땀의 세대는 그래도 발전과 성과를 눈으로 보았으니....
눈물의 세대와 피의 세대 사이에 필요한 것은 땀의 세대의 기도인 것 같다. 겸허한 모국어. 평생 남의말 통.번역으로 밥벌이 해온 나는 겸허한 모국어라는 표현이 참으로 강하고 또 귀하게 와닿는다. 나지막하지만 길고 웅장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울림을 오래 간직하려 한다. 낙엽들이 지는 때 그 울림으로 가을의 기도를 이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