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월요일 아침. 일어나서 처음 든 생각이 매달 15일이면 월급날이었는데... 여서였을까? 맘이 싸-한상태에서 시작한 하루. 지속적으로 뭘 해도 조금씩 엇나갔다. 아침부터 계속..... 그리고 너무나 피곤한 하루 끝을 맞고 있다. 내가 의욕만 앞선 것인가? 내일 하기로 한 일들은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사람들이 보는 나와 괴리감이 너무 큰 것이 아닌가? 원하는 곳으로 이사 오고 아이들과도 가까이 사니까 긴장이 풀어져서 너무 무리하게 오르간이니, 요리강좌니, 브런치 작가니 지나치게 나 위주의 시간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도대체 이렇게 잠들면 내일 일어날 힘이 날지 의심스러워, 아니 잠이라도 편하게 들 수 있을까 겁이 나서, 나는 집사가 대문을 안 열어줘서 산책 못 나가 안달하는 (일이 급한) 몰티즈처럼 불편한 눈빛으로 빙글빙글 집안 여기저기를 서성대다가 밤 9시가 지나서 해서는 안 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고 말았다.
1월 말에 이사 올 때 우리 집에는 금지 아이템인 봉지커피, 이사를 도와주러 오신 사진작가 왕언니의 조용한 명령으로 그 정신없는 중에 근처 마트로 뛰어가 최소 단위인 20개들이 한 박스를 사 왔었다. 그날 왕언니 두 잔 그리고 이사업체, 인터넷, 세탁기 설치 등등 여러 기사님들을 대접하고도 남은 몇 봉이 싱크대 수납장 가장 높은 곳에 아직 (숨겨져) 있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오늘은 카페인 1그람도 안 마셨고.. 일단 마음의 안정이 중요한 것 아닌가?
베란다에 마련한 나만의 놀이공간, 요 며칠 읽다만 책들, 분갈이하던 화분 등으로 잡동사니 창고가 되었는데 얼른 치우고 작년에 아이가 운영하다 폐업한 학원 화분대로 쓰던 플라스틱 책상을 물휴지로 깨끗이 닦고 그 위에 노트북을 펼쳤다. 충전상태를 확인하고 버릴 뻔했던 스탠드도 끌어와 불을 밝혔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나만을 위한 요리를 시작했다. 직구로 산 WMF 인덕션에 밀크 냄비를 올리고 생수 반 병을 정성껏 끓였다. 그리고 급기야 금지된 봉지를 열었다. 작년 내 생일 때 큰아이에게 미리 알려주어 쿠팡으로 선물 받은, 파랑새가 그려진 커피잔에 받침접시 까지 갖추었다. 옛 동료 들이나 내 언니들이라면 싱겁다고 할 정도의 출렁일 만한 뜨거운 물을 부은 것은 물이 많으면 좀 속이 덜 쓰릴까 해서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맛이나 영양소가 아닌 따스함! 예쁜 잔을 두 손으로 쥐니 그것만으로 조금 편안해진다. 그리고 뜻대로 풀리는 게 하나도 없었던 오늘을 돌아본다.
소소하지만 내가 좋아 하는 것들 가끔 적당히 잘 사용하면 입꼬리가 올라가는 효과가 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 것은 두 번째를 맞는 떡만들기 수업에 늦지 않게 가고 싶어서였다. 요리 강좌이니 샴푸도 하고 날씨가 빠르게 따뜻해지니 곧 수납 침대 속으로 들어갈 니트 원피스도 기분 좋게 입었다. 그런데 반머리로 꼽은 집게 머리핀이 영 말썽이었다. 중간에 꽂은 거 같은데 거울을 보면 오른쪽 옆머리가 너무 무겁게 떨어지고 다시 꽂으면 왼쪽이 툭.. 어, 이거 왜 이러지? 일찍 출발하니 도착해서 머리를 좀 만질 요량으로 일단 운전대를 잡았다.
수업 20분 전에 가뿐하게 도착해서 평소처럼 건물 옆면에 주차를 하려는데 기계식 주차장 문이 열리고 나는 잠시 길을 비켜준 후 방금 나간 차가 있었던 자리에 주차해야 했다. 이곳 기계식 주차장은 처음인데 마침 거기 계신 직원분(주차 관련 직무는 아니지만) 친절하게 도와주셨다. 주차 엘리베이터 벽면 거울을 보며 기계식 주차판에 차를 잘 세우고 08번 자리로 넣으려는데 아니 왜 계속 비정상 버튼이 깜빡이네. 도와주시던 분은 친절하게 계속 '제 업무가 아니라서' 하시면서도 여기저기 버튼을 누르시지만 이러다 수업이 늦지... 마음이 급해졌고 안내문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담당자가 오셔서 차량 앞쪽이 튀어나와 있으니 차를 더 뒤로 넣으라고 하셨다. 일러준 대로 하여 주차는 무사히 잘했지만 수업장으로 내려갔을 때는 이미 수업시간 5분이 지났고 테이블 위엔 수업이 꽤 많이 진행되었는지 여러 가지 가루들과 재료들이 놓여있었다. 또 지난번 수업에 비해 너무나 많은 수강생이 오밀조밀 친근한 듯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팥고물과 녹두고물 차이도 모르느데 내가 무슨 떡 만들기를 한다고..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갈까....
힘겹게 수업을 듣고 급하게 기계식 주차장으로 갔다. 0과 8을 누르고 내 차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햇볕 때문에 잘 안보인 건지 내가 잘못 누른 건지 자동문이 열리는데 다른 차다. 남의 차. 새하얀 BMW. 과자 자판기에 초코파이 눌렀는데 페레로로쉐 나온 듯 순간 기분 좋게 놀랬다가 이건 아니지 잘못 올라온 차를 내리고 내차를 올리는 기나긴(?) 과정에서 혹 택배가 이런 식으로 잘못 온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다가 차가 올라오자 허겁지겁 씽 돌려서 차를 뺐다.
집에 잠깐 들렀다가 큰아이 물리치료받는 시간에 맞추어 다시 차를 몰고 병원에 내려주고 일정에는 없었지만 시간 여유가 있어 1주일에 2시간 할 수 있는 오르간 연습을 위해 근처 대학교 평생교육원을 찾았다. 마침 담당 조교님이 외근 중이어서 다른 분이 도와주시는데 웬걸 오르간 레슨실 열쇠가 없다고 하시네. 있는 열쇠로 이 방 저 방 열어 주셨지만 발 페달이 있는 오르간 레슨실은 없었다. 30 분쯤 기다리다가 피아노 방이라도 쓰라고 하셨지만 한창 건물 외벽 공사 중인 씨끄럽고 추운 학교에서 굳이 발 페달 연습이 아니라면 시간을 더 보낼 필요를 못 느껴 그냥 발걸음을 옮겼다. 참 내가 무슨 오르간을 배운다고... 그냥 유튜브로 들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한데 굳이... 요즘 오버하는 거 아니냐....
그래도 아직 한 가지 정도는 기대할 일이 남았다. 지난주에 '나눔 박스를 이용하는 주부'역으로 출연한 저녁 생활 정보 TV 프로그램이 오늘 방송된다.. 본방 사수를 위해 10분 전부터 TV 앞에서 핸드폰 촬영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촬영할 때 이름 없는 주부 역이지만 그래도 에쁘게 한 컷 잡혀야 한다는 일념으로 미용실도 가고 아직 쌀쌀하지만 연두색 탑과 보라색 재킷으로 복장을 나름 '봄' 느낌으로 갖추었다. 이사하면서 필요 없게 되어 나눔 박스에 넣을 멀티탭 등 가전제품도, 인터뷰 때 할 맨트도 신경 써서 준비했다.
"제게는 짐이 되는 물건이 어떤 분에게는 살림살이가 되어 잘 사용된다니 정말 보람 있어요!"
라고 하며 정말 기분 좋게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기대감에 방송을 기다리는데 허걱 정말 자연스럽게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추웠는지 얼굴색은 잿빛에 인터뷰는 대부분 편집되어 사라지고, 그나마 방송된 멘트도 버벅버벅... 미용실 부원장님이 싸비스로 해 주신 아이롱 머리는 축 쳐 저서 지저분해 보이고... 조금 배워서 본격적으로 단역 알바를 시작해 보려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PD님이 좋은 분이니 어색해도 그냥 넘어간 거고 내가 아니라도 쓸 분량 이상의 촬영이 되어있으니 빨리 끝난 것을... 급하게 TV를 끄고 촬영한 내 분량의 방송도 지운다
진짜 오늘은 bad hair day구나. 고개를 저으며 터벅터벅 베란다의 노트북을 켜고 브런치에 들어가려는데 문득 이번 달에 양평으로 이사한다는 옛 동료 언니 생각이 났다. 문자 말고 말로 하는 수다도 그리워 통화되냐고 하니 바로 전화가 온다. 요즈음 사는 이야기랑 오늘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려는데 양평으로 이사 들어가셨어요?라고 대화가 시작되어서인지 그 언니의 짐 정리와 이사 준비, 잔금과 집 레노베이션 그리고 10여 년간 장남인 동생 내외가 모셨던 친정어머니가 요양병원으로 가신 이야기, 하지만 앞으로 양평 집으로 모시고 올 거고 그러기 위한 여러 가지 고민과 과제에 대해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의 bad hair day는 전혀 bad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리고 요양병원, 휠체어, 치매, 입주요양보호사 등의 나와 결코 멀지 않은 그래서 더 힘겨운 주제들이 요리특강에 늦거나 오르간 연습 허탕은 말할 거리도 안 되는 것으로 느끼게 했다.
Having a bad hair day? 딱 나의 오늘처럼 만사가 내 뜻과 반대로만 흘러가는 것 같은 날이 가끔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 이유가 좀처럼 맘에 안 드는 머리 스타일이든 내 예상과 달리 펼쳐지는 세상사이든 중요한 건 Bad hair day가 Bad heart day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나에게 힘을 주는 작은 거라도 실천하고, 그것이 커피 한잔이든 독서든, 산책이든, 무거운 기분이 내 의지까지 나락으로 끌고 가는 것을 피할수 있도록 주위를 환기 시켜야 한다. 한없이 초라하고 궁상맞고 짜증스러운 기분이 외적, 내적 이유로 들 때가 있고 그 기분을 내가 컨트롤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그 기분이 나를 짓누르게 둘 필요는 없다.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Scarlet O'hara: Gone with the wind)
만사가 내 뜻과 정반대로 펼쳐지는 듯한 bad hair day도 하루면 끝난다. 힘들었어도 그렇게 잘 지나 보냈으면 그걸로 된 거다. 내일은 좀 더 여유를 갖고 준비할 테니까 분명 더 평화롭고 보람 있는 날이 될 거야. 작은 베란다에 마련된 나만의 슈필라움 (Spielraum). 따스한 컵과 마음껏 노트북을 펼칠 수 있는 플라스틱 책상이 참 고맙다. 살포시 마음의 짐들을 노트북위로 내려놓는다. 그리고 내게 속삭인다. 오늘 잘 견디었네. 수고 많았어. 그리고 기억해. 지금 아무리 어두워도 아침이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는 걸!
에필로그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져 이제 잘 준비를 하려고 욕실 불을 켰는데 뭔가 낯선 욺직임. 머리카락인가 하고 보니 으악! 작은 거미가 침입해있다 아까 베란다 문을 너무 오래 열어 두었나보다. 오늘은 끝까지 bad hair day구나.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거미를 베란다 밖으로 퇴출시킨다. 너도 살려다 보니 여기까지 왔겠지만 우리집은 안된다. 그래. 거미가 내 욕실에 들어오는걸 100프로 미리 차단 할 수는 없지만 들어온 거미가 내집에 거미줄을 치고 거미집을 만들게 둘 필요는 더더욱 없지. 거미를 내보내며 거미줄 같이 얼키고 설킨 오늘의 bad hair도 훌 훌 날려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