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은 강연 펑크
하루에 서너 군데의 강의를 하려면 강사는 정신이 없다. 저녁 늦게 까지 일정을 마치고 나면 진이 빠진다. 나는 한 번의 강연으로 체중이 500g이나 빠지기도 한다. 그만큼 강연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그래서 체력관리가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스케줄을 관리하지 못하면 강사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다음의 두 사례는 어떤 강사의 실수담이다. 강사들은 아무래도 같은 직업군에 있는 사람과의 모임이 많다. 사석에서 술 한 잔을 걸치면 포복절도할 이야깃거리가 넘쳐난다. 직업이 강사이니 그 표현력이 얼마나 실감이 나겠는가.
<사례 1>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전화를 받았다.
“강사님, 지금 어디쯤 오고 계신가요?”
스케줄 표를 확인하니 한 시간의 착오가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이곳에서 한 시간의 강의를 더 해야 하는데, 다음의 일정은 한 시간 후에 강의를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손오공도 아니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서 자신의 분신을 여럿 만들 수는 없기에 한 곳은 포기해야 한다. 강의의 펑크는 강사라는 직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동시간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고 냉큼 강의 요청을 수락한 결과다. 화장실에서 고민을 하다가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억지로 눈물을 짜내고 교육담당자에게 달려갔다.
“어, 어,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엉 엉 꺼이꺼이.”
시커먼 마스카라가 얼굴로 번져서 엉엉 우는 여강사를 보고 교육행사 담당자가 더 슬퍼하고 당황했다.
“강사님, 빨리 병원으로 가보세요. 제가 피교육생에게는 사정을 설명하고 제가 대신 진행할게요. 내일도 오셔야 하는데, 다른 강사님으로 대체할까요?”
“아니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여강사는 눈썹을 휘날리며 운전해서, 응급실이 아닌 다음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찾은 강의실. 밝은 표정으로 교육담당자를 만나 인사를 했다고 한다. 담당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제와는 너무 다른 표정을 보고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괜찮으신지요?”
‘앗 차.’ 여강사는 표정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꿨다.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그 강사는 강의보다 연극배우를 했으면 크게 성공했을 것이다.
<사례 2>
그날은 강의가 없는 날인 줄 알고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영화도 두 편 보고 구입해놓고 읽지 못한 책들을 보며 다음 강연을 준비할 것을 상상하면 행복하다. 얼마만의 여유이자 힐링이란 말인가? 그런데 갑자기 단잠을 깨우는 요란한 전화 벨소리.
“강사님, 지금 어디쯤 오고 계시죠?”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오늘 우리 회사 강의하시잖아요?”
그때서야 오늘 강의가 있다는 것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비극적 상황을 인지하고 벌떡 일어났다. 양치나 세면을 할 여유가 없었다. 후다닥 정장을 차려입고 지하주차장으로 냅다 달려갔다. 마치 카레이서처럼 곡예하듯 운전을 하면서 차 안에서 가글을 하고 일회용 물수건으로 대충 얼굴도 닦았다. 룸미러에 비친 모습은 다른 날과 차이가 별로 없어서 안심했다. 몇 번의 신호위반과 추월로 가까스로 강연 장소에 도착할 즈음. 눈물을 머금고 차를 다시 집으로 돌려야 했다. 강사생활 최초로 강의 평크를 내야 했던 것이다. 상반신의 복장과 얼굴은 완벽했지만 무언가 허전해서 밑을 봤더니 아랫도리는 팬티 차림으로 운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어느 여성 강사님의 경험담이다.
다음은 내 경험담이다. 한강의 지류인 중랑천 변에서 운동복 차림으로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역시 비슷한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옷을 갈아입고 갈 시간이 없어서 바로 도로를 건너서 택시를 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 택시기사님은 한 개의 차선으로 속도를 지켜가며 정속 주행을 하고 있었다.
“제가 급해서 그런데, 조금 밟아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뭐라고? 내가 가는귀가 먹어서 잘 안 들려.”
생각 같아서는 내가 할아버지 대신에 운전석에 앉고 싶었다. 나는 다시 큰 소리로 절규하듯 외쳤다.
“어디서 마빡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어른한테 고함이야? 그렇게 밖에 교육을 못 받았어?”
“그게 아니고요. 제가 너무 급해서요. 저 좀 살려주세요.”
택시기사님은 말을 퉁명스럽게 했지만, 열심히 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뿐이었다. 몇 분을 남기고 기적적으로 강연 장소에 도착했지만, 내 속은 까맣게 타서 재만 남았다. 강사대기실에는 팀장님이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팀장님 일단 벗으시죠.”
팀장님은 내 운동복으로, 나는 팀장님의 정장으로 갈아입고 함께 강의실로 뛰었다. 1분의 차이로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무대 위에서 팀장님은 숨을 헐떡이며 강사소개를 하고 나는 더 숨을 헐떡이며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청중들이 강연을 시작하기도 전에 웃기 시작했다. 팀장님의 운동복 상의와 하의 사이로 배꼽이 고개를 쳐들고 나와 있었고, 나 또한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양복 상의에 항공모함을 신은 허수아비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팀장님은 나보다 신장이 15Cm 정도 크신 장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안 되지만, 팀장님과 나는 서로를 보고 배꼽을 잡고 폭소를 터뜨렸고 청중의 웃음소리도 더욱 커졌다. 그날 강의 평점은 100점 만점 퍼펙트였다.
강사에게 ‘지각’은 일반인들의 회사 지각과는 차원이 다르다. 강의 펑크나 지각 한 번으로 다시는 마이크를 잡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세계가 소문이 빠른 곳이다. 강의력에 앞서는 것이 강사의 기본자세이기 때문이다. 강사는 피교육생보다 높은 기준을 요구받는다. 약속 시간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강사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이후로 꼼꼼히 일정을 챙기기 시작했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강연장 근처에 일찍 도착해서 주변 커피숍에서 강연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