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파마를 했다. 3년 전에 했던 파마가 가장 최근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미용실 가는 돈이 아까워 고민이 많았더랬다. 몇 년 만에 하는 파마라서 잘 어울릴지, 어떤 파마를 할지, 어디가 잘할지, 비용과 시간은 얼마나 들지 등등 고민이 많았다.
3년 전 파마는 내 생일에 친정엄마 찬스로 거금을 들여 경험한 '인생 파마'였다. 이번엔 돈이 머리스타일보다 더 신경 쓰여서 발길 닿은 어느 동네 미용실에서 파마를 했다. 그리고 미용실을 나오며 바로 후회했다.
'아니 세상에 이런 머리를 돈 주고 했단 말이야. 망했네, 망했어. 이래서 돈이 돈값한다고 하는구나. 에잇.'
그러다가 슬퍼졌다. '오늘 간 미용실을 비교해보니 3년 전 미용실은 비싼 게 당연했다. 근데 난 그 돈이 내 일상에선 너무 큰돈이고, 다시 갈 확률은 거의 없다. 이번에 파마를 해보니 그날의 만족감은 다른 어떤 곳(내 예산 범위 내의 미용실)에서도 얻을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든다. 어쩌지?!'
경험을 통해 비싼 미용실이 얼마나 만족스럽고 좋은 것인지 확실히 알게 됐다. 다음번에 파마할 일이 생긴다면 과연 나는 동네 미용실을 갈 것인가? 아니면 확실한 만족이 보장되는 비싼 미용실에 갈 것인가? 미용사가 알아서 척척 해주는 비싼 미용실과 내가 여러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의 시간을 거쳐야 하고 결과 만족까지 복불복인 저렴한 미용실, 어디로 갈 것인가?
좋은 것을 알게 됐는데, 돈 때문에 평범 혹은 그 낮은 단계로 가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그렇다고 소비능력을 갖추려 수입을 늘리려고 되지도 않을 일을 벌이는 건 노예행, 지옥행 열차 탑승이다. 그런데 소비 수준이 갖춰지지 않아서 억지로 나쁜 걸 받아들이는 것도 불행하고.... 아 어쩌란 말!
여기까지가 대략 지난여름 어느 날 고민을 하면 쓴 글이다. 그리고 요즘 실존주의 철학자들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보니 '이거슨 바로 선택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고쳐 쓰게 됐다.
나는 내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지만, 내가 처한 상황- 과잉 아니면 결핍인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과 노동, 소비의 현장 - 에서 아주 골 때리는 고민을 하며 지난 여름 어쩌지도 저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게 아닌가!?ㅋ 아마도 충동적으로 지름신 영접이라는 막다른 골목,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고민을 본능적으로 써본 것 같은데, 결국 답답함에 글쓰기를 중단한 게 아니었나 싶다.
이제 어느 정도 상황이 가늠이 되었다. 나에겐 행복한 소비를 위한 보호벽이 필요하다. 그래서 최근 노트를 뒤적이다가 발견한 돈과 소비에 관한 조언 메모를 바탕으로 미용실 선택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그래 결심했어!
조언 하나는 돈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만드는 도구라는 관점이다. 단순히 돈과 서비스 혹은 물건의 교환이 아니라 가치를 교환해서 서로 관계를 만든다는 거다. 가치와 관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탁월한 실력을 갖추기 위해 미용사가 들인 노력과 시간을 인정하는 방편으로 비싼 미용실 택하는 게 맞다. (사실 마케팅 비용이나 인테리어 비용 같은 부가적인 요소들로 인해 가격 상승이 있을 수 있지만, 내 경험에 근거해 일단 미용사를 인정하기로.....)
다른 하나는 '시간을 벌기 위한 지출인가? 아니면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지출인가?'를 파악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시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용실 가기 전과 후의 시간을 아끼는 방편으로 고민의 시간을 없애주고, 만족감이 뛰어난 비싼 미용실로 가야 한다.
그렇다. 비싼 미용실로 선택이 기운다. 그런데 나는 조물주 위의 건물주도 아니므로 이번 생에서 모든 것을 최상의 것으로 누릴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또 선택해야 한다. 나의 만족감과 나의 행복과 타협할 수 없는 음.... 나만의 사치품목을.
예를 들어 파마하기는 자주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1년 혹은 2~3년에 한 번 욕구가 생기는 것이니 비싼 돈 들여도 괜찮다. 3년 전 파마를 하고 집에 올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싱글벙글 웃으며 '이렇게 좋은 걸 왜 안 하고 있었지, 왜 그렇게 고민했었지?' 생각했었다. 이런 만족감이라면 20만 원 두 눈 질끔 감고 쓰기로 한다.(막상 액수를 쓰고 보니 덜덜.........).
이제 이 고민은 주욱 이어질 것이다. 지출 품목에 따라서, 돈에 대한 기준이 달라지면서, 관계나 시간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이상 돈맛을 안 볼 순 없고, 내 분수를 지키면서 즐거움과 수준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
사실 돈을 쓰고 살아오면서 쭉 해 왔을 고민이었음에도 지난 여름처럼 '아, 어쩌란 말이야'라는 말로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살아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충동구매나 절약 소비를 해서 후회로 끝난 지출을 내 탓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소비를 유도하는 사회 탓으로만 돌렸다. '의지박약이라서 그래.'와 같은 우스갯소리는 했지만, 이번처럼 주체적 소비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나는 똑똑한 소비주체이다.
나는 이제 이렇게 나를 지키겠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내 행복과 맞바꿀 수 없는 것들, 비록 내 주머니 사정에 비해 비싼 것들 일지라도 내게 만족감을 주거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확장하고 나에게 여유를 주는 것이라면 기꺼이 선택한다. 누군가의 충동질에 의해서, 나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과시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다.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소비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