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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주얼페이지 Jan 30. 2021

우리가 남이가

우리는 부모다. 양육수당의 주체다. 남이 아니다.


"작가는 2013년부터 만 0~5세 영유아에 대한 전면 무상보육이 실시되면서 전업주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더 커진 상황에 주목했다. 이 정책은 아동수당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어린이집에 정부 지원금을 주는 형태였기 때문에 가정 보육을 하는 것보다 어린이집에 보낼 때 훨씬 더 이득을 받도록 설계됐다. 하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는 시간은 보통 오후 9시에서 오후 3시 사이였으므로 다시 경제활동을 시작하기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바로 이 시기부터 전업주부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되었고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작가는 소설에서 바로 이런 사회적 혼란 속에 던져진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 이야기를 구현해내고자 했다. 맘충이라는 말의 등장은 실패한 정책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것이 당연해진 '여혐민국'을 집약적으로 가시화했고, 혐오가 만연한 사회가 넘어버린 어떤 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p. 41, 권김현영



양육수당은 부모가 받아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주체인 부모가 양육수당을 받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양육수당을 어떻게  것인지는 부모가 결정해야 한다. 가정 보육할 것인지, 기관에 보내 돌봄을 받도록  것인지, 육아공동체를 만들어 동네 아이들을 함께 키울 것인지, 대안교육공동체를 선택할 것인지, 부모가 결정할  있도록 해야 한다. 부모가 결정할 힘을 갖기 위해서는 부모의 통장에 현실성 있는 금액의 양육수당이 지급되어야 한다. 부모가 양육수당을 받고 어린이집에 보육료를 결제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가정보육을 하게 되면 연령에 따라 다른 금액의 양육수당을 매월 지급받고, 기관보육을 선택하면 기관으로 보육료가 지원된다. 가정양육수당과 보육료 사이에 차이가 매우 크다. 12개월 미만의 아이에게는 20만 원의 양육수당이 지급되는 반면, 기관보육을 하게 되면 454,000원의 보육료가 지원된다. 만 3~5세를 비교하면 가정보육은 10만 원, 기관보육(민간) 29만 원(가정형)이 나온다.

양육수당은 영유아보육법 제34조의 2 따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이용하지 아니하는 영유아에 대하여 영유아의 연령과 보호자의 경제적 수준을 고려하여 양육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할  있다.' 법 조항은 이러한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  기관에 보낼 경우  금액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인식을 하게끔 무게추가 기울어진 선택지를 부모는 받게 되었나?  아이를 키우는 주체, 당사자인 부모들의 노동은 기관 보육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인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가부장제 사회의 정치에서 여성의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은 당연한 것이고, 가정주부는 시혜자로 인식될 뿐이다. 돌봄'노동' 하는 행위 주체가 아니다. 현실 반영 제로인 양육수당임에도 국가의 보살핌에 감사해야 하고, 현실성 있게 금액을 상향하게끔 요구하는 것은 부모로서 자격이 없다. 하지만 기관은 돌봄 노동을 하는 주체로서 경제적 상황(운영)까지 고려하여 양육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받는다.

증액을 요구하거나, 양육수당과 보육료를 똑같이 산정해달라고 요구할 단결력이 엄마들은 없다. 보육기관을 운영하는 이들의 단합은 힘이 세다. 힘이  그들과 정치인들의 결탁 앞에서 엄마들은 자신들의 희생과 고통을 경쟁하느라 단결력은 더욱 힘을 잃어간다. 엄마들이 처한 경제적, 사회적 역할  상황은 다르고, 가사와 돌봄, 직장생활 등으로 지친 엄마들은 서로를 이해하기가 힘에 부친다. 워킹맘과 전업주부, 경단녀 등의 갈등 조장하는 신문기사를 보라. 엄마들이 서로를 타자화하는 사이 정치인과 협회는 자신들의 곳간을 채워나가고 세력을 늘려나간다.  


아이를 키우는데 드는 품과 시간은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면서, 내 아이를 위한 선택은 스스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들, 맘충이라는 인식만 널리 퍼지게 한 '실패한 정책'을 만든 그들은 누구인가. 지금 양육수당체계에서 양육 주체는 뒷전이 되어버렸다. 엄마들은 각자의 처지,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 혹은 희생 정도를 경쟁하고 피해자로서의 지위를 얻기 위해 투쟁할 뿐이다. 그 사이 그 돈은 누군가의 쌈짓돈이 되어간다. 그 돈으로 생색내는 자, 재산을 불리는 자, 누구인가. 누가 이익을 보고 있는가.


+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배운 것을 이글에서 풀어놓아서, 말이 비슷하다. 작가님께 실례가 될까 걱정된다. 아직 내 머릿속 언어가 아니라서 그런지 글 쓰고 말하는 게 어렵다. 내가 본 것을 여성학자의 문장을 빌어서 쓰는 연습을 통해 내 언어, 생각을 다져나가고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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