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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주얼페이지 Feb 13. 2021

너는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나와 타자들> 읽기

<나와 타자들>을 읽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을 분석한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는 게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신문기사나 칼럼을 생각하고 읽었는데, 난이도는 훨씬 높았다. 저자는 여러 사회학자나 정치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주장을 펼쳐나가는데, 내 밑천이 너무 바닥이라서 행간을 이해하는 게 어려웠다.
 
저자가 설명하는 내용, 예를 들면 정치영역에서 감정의 역할에 대한 좌우파의 의견차나 정치적 올바름을 대하는 좌파와 자유주의는 낯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우파의 논리-정치적 올바름을 환상으로 만드는 작업-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 그럼에도 그 편견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난감하다.  
 
저자는 개인주의를 1세대에서 3세대까지 나누고, 각 세대별로 특징과 문화와 종교, 정치 영역에서 어떻게 개인과 사회에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밝힌다. 저자가  강조하는 건 만남 구역의 도입이다. 법과 규제(정치와 종교 같은 권력의 개입) 없이, "통일된 (교통) 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개인들이 이곳에서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공간에서 "다원화된 개인들은 유사성이 아닌 다양성을, 자신들의 차이를 나눈다".
 
이 공간이 굉장히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내게 저자는 홉스 식의 사회 정의에 길들여졌다고 일침을 놓는다. 저자는 "규칙은 위반을 생산하는 반면, 탈규제는 조심하고 서로 소통하며 배려하는 교통 참여자를 양산한다. (...) 순전히 자기 보존 본능을 통해서 자기 통제와 자기 책임을 가져왔다. 이것이 개인의 이기주의를 잘 작동하는 거대한 전체에 결합시키는, 아무런 도덕 없이 작동하는 만남 구역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 규제하는 모든 권위의 너머에는 혼란이 아니라 공유 공간이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다원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지녀야 할 질문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경계 짓는 '너는 누구냐?'의 질문이 아니라, '너는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소속이 온전하고, 정체성이 완전하다는 생각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저자는 내가 관계하는 공동체- 종교, 민족, 사회 등은 허구일 뿐이라고 말하며 문화는 변한다고 말한다. 문화는 "사람들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맺는 관계"다. 나는 변화한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예전에 신문 기사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땐 참 좋은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이란 이 단어가 좌파와 우파가 올가미를 씌워 옭아맬 수 있다는 게 너무 무섭다. 영합 게임의 구조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본 게임이론이 생각난다. 비 영합 게임로 만들 수 있어야 하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전략이 좋은 전략이라고 했다. 포퓰리스트들은 이분법적으로 사고한다. 적대적이고 이중적인 관점으로 타자를 배제한다. 나눌 수 없는 것에 집중하여 사람들을 자극한다. 경계를 짓고 닫는다. 이런 식으론 집단이나 개인이 잘 살기가 어렵다. 서로 상처를 줄 뿐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은 우선 협력하되 배신에는 배신으로 응징한다. 반복된 게임 시뮬레이션에서 여러 전략과 상대했을 때 가장 높은 승률을 보였다고 한다. 허구를 받들어 모시며 서로를 헐뜯을 것이 아니라, 허구를 물리치고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보는 차원으로 정치? 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포퓰리스트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말아야 한다.    
 
저자도 말한다. 현재 다원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1세대 개인주의 사회와 달리 개인의 정체성이나 소속의 근거가 되는 단체나 국가, 민족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에 스스로 정체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 속에서 신자유주의 물결로 인해 살아왔던 사회가 흔들리는 걸 느끼게 되고, 사람들은 종교 근본주의나 인종주의 등 극우 성향으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극우파들은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다원화된 사회와 싸운다.

"이슬람주의자뿐만 아니라 인종주의자들에게도 진정한 적은 다원화된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사회이며, 무신론적이고 세속적이며 민주적인 68세대의 세계다. (...) 서구는 행복을 제공하는 자본주의의 천국에서 점점 더 페미니스트적, 동성애적, 다원적, 세속적인 공간이자 정치적으로 올바른 곳이 되어 가고 있다. 최소한 그럴 가능성이라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런 한 서구가 지금 양쪽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상대방은 누구인지 올바르게 보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가? 1세대처럼 유사성에서 바탕하여 정체성을 추구하진 않고, 싸움이나 의지를 통해 정체성을 갖는 2세대도 아닌 듯하다. 심정적으론 3세대라고 주장하고 싶은데, 과연 지금 내가 얼마나 다원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나... 다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지 생각하니, 그것도 아니다.
 
작은 지역사회에 살고 있다. 작은 사회의 특수성에 더해 코로나 19로 폐쇄적으로 실내생활만 하다 보니 다양성이란 말이 굉장히 거리감 있게 느껴진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전에 나는 외국에서 다양성의 일부로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땐 분명 다원화 사회의 보편화가 빨리 이뤄지길 바랐을 것인데, 지금 내 나라에 있는 내게 다원화는 먼 나라 얘기가 되었다. 난민과 외국인 노동자 처우 문제는 늘 신문에 등장한다. 이렇게 모르는 척 살고 있는 내 모습은 경계 짓는 1세대 개인주의자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나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인가? 왜 내 나라에서 나는 정체성이 더 강화되는 것일까? 물론 외국에서 애국심이 강해질 때가 있기도 한데, 대부분 위축되어 보냈던 것 같다. 이 부분도 쓰다 보면 긴 긴 얘기가 나올 듯한데, 음.... 이 부분은 생각을 좀 더 정리해서 글을 써야겠다.

책을 읽고 정리해보고 싶은 것들은 대충 다 쓴 것 같다. 이제 마무리다~! 저자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변화와 방어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알려준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허구와 환상, 사실인지 알아야 한다. 다원화는 사실이다. 감정(분노)은 민주주의 정치에서 변화, 진보의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잘 활용해야 한다. 만남 구역은 하나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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