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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jin Shin ㅣ 신유진 Dec 26. 2022

방바닥에 놓인 화이트보드

내게 2022년은 고민의 연속이었다. 어느 해보다 내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잘 모르겠는 한 해였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10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미국에서 진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겼고, 존경스러운 동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생겼고, 미국 대학에 초청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내가 과연 디자인 학교에 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맨 땅에 어떻게 헤딩하는지도 모르고 끊임없이 헤딩하던 유학준비 시절을 생각하면 너무나 훌륭한 현재였다.


10년 동안, 나는 많이 설렜고 경쟁에 지쳤었고 자존감이 높아졌고 가족을 그리워했다. 영양소의 불균형이 생겨서 몸이 아픈 것처럼 내 인생이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아 삐그덕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렸던 미래를 가지고 있던 미국의 삶과 너무나 사랑하는 가족이 사는 한국이 왜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슬펐다. 둘이 서로 다른 세계로 나에게 존재했다. 비행기를 타고 15시간을 타고 가야 닿을 수 있는 먼 세계였다.


문득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이렇게 불안정하게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며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명확한 커리어 기회가 있지 않았다.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컸다.


화이트보드를 샀다. 내 마음이 너무 실타래 같이 엉켜있어서 그걸 다 담아서 큰 도화지에서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살 수 있는 가장 큰 화이트보드를 샀다. 그런데 너무 무거워서 벽에 걸 수가 없었다. 그냥 바닥에 두고 쓰면 되겠지 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고 보드는 그대로 바닥에 놓여있었다.


매일 바닥에 방치된 화이트보드를 보며 오늘은 벽에 달아야지 생각했다. 한국에 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질수록 보드가 마치 땅에 고정된 것처럼 느껴졌다. 화이트보드 하나 벽에 못 거는 내가 게으르게 느껴졌다. 무겁다고 짜증도 났던 것 같다.


어김없이 산책을 하고 돌아온 어느 날, 그냥 그날은 화이트보드를 달아야겠다 했다. 물론 무거웠지만 책상으로 받히고, 이런저런 도구를 준비해 아무 생각 없이 보드를 달기 시작했다. 보드를 다는 것에 집중을 하나 보니, 이게 무거운지 아닌지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동안 왜 달지 못했나 싶게 금방 벽에 달아버렸다.


보드를 벽에 달면서 덩달아 무겁고 복잡했던 내 마음이 내려놓아진 것 같다. 한국은 그냥 가는 것이다. 가서 이것저것 해보면 된다. 열심히 살았던 내 과거가 나를 도와주겠지. 과거의 나를 믿어보고 미래의 내게 부탁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 되겠지.


돌아보면 화이트보드로 생각을 정리하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고민되는 마음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나 보다. 그리고 그게 눈에 보이는 것이라 좋았다. 해결되지 않은 나의 마음을 보여주었던 화이트보드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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