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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Apr 07. 2023

37. 돈이 없지 자존심이 없나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야, 나대니까 좋냐?” 날카롭게 꽂힌 그녀의 한 마디.


“네???”


“사장님한테 알랑대고 손님한테 알랑대면서 물건 파니까 좋냐고.”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지, 말대꾸를 해야 하는지 결정 내리기도 전에 그녀는 그동안 억한 심정이 쌓였었는지 당황스러운 말들을 쏟아냈다.


우리 매장에서는 매달 주력상품을 몇 개씩 팔았는지 체크하는 종이가 있었다. 포스기 뒤쪽에 붙여놓고 결제를 받을 때마다 체크를 해놓았고, 직원 전체의 실적이 한눈에 보이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매달 총합을 계산해서 인센티브를 받았기 때문에 다들 눈에 불을 켜고 판매에 열중했다.


당시에는 마스카라 픽서라는 제품이 주력상품이었는데, 마스카라를 하고 그 위에 덧바르면 풀처럼 굳어서 하루종일 속눈썹이 처지지도 번지지도 않는 좋은 제품이었다. 제품가가 높지 않으니 몇 개 팔아봤자 인센티브도 참 코딱지 만했지만 그걸 가지고 이럴 줄이야. 아무래도 그녀는 평소에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리라.


“언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이 삽시간에 깜깜해지더니 이내 하얗게 되었고 그 짧은 순간에 깨달았다. 그녀가 내 따귀를 갈겼다는 것을.


“이해가 안 돼? 영어로 해줘야 돼? 한국말 못 알아 처먹냐고. 외국에서 돈지랄까지 하고 오신*이 지금 상황판단이 안돼?”


“…..”


이런 상황이 오면 이제는 맞서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해왔다. 더 이상 우습게 보이지 않을 거야,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을 거야, 더 이상 침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한순간에 무너진 다짐, 그리고 자존심. 언제나 이런 순간에는 몸이 굳고 정신이 멍해져야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길 기다릴 뿐이었다.


“고작 돈 몇 만 원 더 벌려고 꼬리 치면서 장사하니까 좋냐? 좋냐고 이 **아. 내가 너만 할 땐 교복 입고 착실하게 학교 다녔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나대고 **이야.”


'저도 학교 다니고 싶어요. 전교꼴등을 하더라도 교복 입고 가방 메고 등교하고 싶어요. 친구들이랑 교복치마 말아 입고 떡볶이 먹으러 다니고 싶고요, 앞머리에 롤 말고 체육복 바지에 무릎담요망토 뒤집어쓰고 야자라는 것도 해보고 싶어요. 남들 다 하는 거, 했던 거, 저도 다 하고 싶어요. 제가 몸이라도 팔았나요? 화장품 파는데 울면서 팔 수 있나요? 간식 사다 준 사장님한테 욕이라도 했어야 했나요?'


마음의 소리는 마음의 소리로만 남아있을 뿐.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맞서보지 못한 사람은 그 한 번을 맞서기가 죽도록 힘든 것이었다.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어른들은 언제나 각자의 기준이 있었다.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앞뒤 상황도 모른 채 나를 멋대로 재단했다. 손찌검을 하던 그 언니와 매장에서 수군대던 다른 언니들뿐만이라 아니라 마주치던 모든 어른들은 내게 걱정이랍시고 하나씩 생채기를 남겼다. 학교 밖 청소년은 모두가 비행청소년이라는 그들의 기준 때문에.


어쩌면 비행청소년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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