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번째 리뷰_생존자
문학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써 내려간 자기 반성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것들, 그런 상황들을 우리는 견뎌낼 수 있는 것일까. 살아남은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견뎌낸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백기 투항한 것이 아닐까.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남들에게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문학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죄책감을 은유라는 형식으로 자기 스스로에게 고백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문학 작품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인 로맹 가리는 <유럽의 교육>에서 살아남은 레지스탕스 야네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추악한 짓을 벌이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해요. 타데크 흐무라가 옳았어요. 유럽에는 가장 오래된 성당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대학들, 가장 커다란 도서관들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서 가장 훌륭한 교육이 이루어지죠. 세계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유럽을 찾아와요. 공부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 유명한 유럽의 교육이 가르치는 것은 결국, 자기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을 죽이는 데 소용이 될 만한 그럴싸한 이유들과 용기를 찾아내는 법일 뿐이에요. 얼음판 위에 스케이트를 신고 앉아서,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방아쇠가 당겨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요."(유럽의 교육, 328p)
헝가리 작가인 게오르그 루카치는 단편소설 <마음의 가난에 관하여>에서 요한계시록의 문구를 인용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며,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수용소 문학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콜리마 이야기>는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의 의미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훈장이 아니다. 그것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수용소의 인식표 같은 것이다. 콜리마 이야기를 쓴 바를람 샬라모프는 수용소에서 통용되는 속담을 하나 소개했다.
'수용소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적은 배급 식량이 아니라 많은 배급 식량이다.'
<생존자>라는 책이 있다. 미국에서 출간된 책의 원제목은 '(The)surrendered'. 원제목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투항자 정도가 된다. 그런데 이 책의 한글 제목은 생존자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660페이지나 되는 긴 책을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생존자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미국에 정착한 한국인 교포 준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병사 헥터,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던 선교사 아내 실비가 주인공이다. 소설은 한국전쟁 전후와 1980년대 미국을 오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낸다. 준은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한국전쟁에서 모든 가족을 잃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유럽으로 긴 여행을 떠난 하나뿐인 아들을 찾아 나선다. 한국전쟁 직후 고아원에서 만난 헥터가 그녀의 조력자가 된다. 그렇지만 그들은 삶의 어려움을 헤쳐낸 동지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추악한 뒷모습을 알고 있는, 그래서 평생 동안 서로가 서로를 피해 다녔던 사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생존자는 투항자일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버리고 악다구니를 쓸 수밖에 없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만이 살아남는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공한 인생을 산 것처럼 보이는 준이나 나이를 먹고 나서도 단단한 몸을 유지하며 하루하루 자족하며 살아가는 헥터도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내면은 전쟁을 겪으며 이미 무너져 내렸다.
그렇지만 생존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전쟁을 겪으며 가족 모두를 잃었던 준을 누가 욕할 수 있을까. 준은 다만 살아남고 싶었던 것뿐이다.
준은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들 모두를 사랑했지만 뒤를 돌아보게 되면 자신은 끝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멈추게 될 테지만 아직은 멈추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갈망한다는 것은 결국 시간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저 시간을 좀 더 가지고 싶었을 뿐이다. 마지막 객차의 바퀴가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내면서 섬광을 번쩍였다. 그것은 속도를 내며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소리를 질렀다. 다음 순간 그녀는 숨을 멈춘 채 문의 시커먼 모서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뒤쪽으로 세상이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누군가가 그녀를 끌어올려 품어주었다. 그녀는 지면에서 발을 뗐다. 살아남은 것이다.(생존자, 660p)
<생존자>를 쓴 이창래의 글은 꾸준하고 침착하다. 디테일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인물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적지 않은 분량인데도 긴장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된다. 특히 준이 동생들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 초반부의 묘사는 상당하다. 이 책은 그 초반부와 마지막 페이지만으로도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