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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Jan 01. 2018

바다는 멀리 바라보라는 소리입니다

올해의 문장들

tbs 교통방송 심야라디오 프로그램 '황진하의 달콤한 밤'의 책 소개 코너 '소설 마시는 시간'입니다.

매주 토요일에서 일요일 넘어가는 자정에 95.1MHz에서 들으실 수 있어요.

대략적인 방송 멘트와 음악을 뺀 편집본을 들을 수 있는 링크를 매주 올릴 예정입니다.


12월 31일 열 번째 방송은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들을 다섯 개 골라봤습니다 :)


↓소설 마시는 시간 멘트↓


ann 책 속에 담긴 인생의 지혜를 음미해 보는 <소설 마시는 시간> 오늘은 어떤 주제로 이야기 나눠볼까요  

오늘은 대망의 2017년 마지막 날이잖아요. 그래서 전처럼 책 두 권을 소개하기보다는 조금 힘을 빼고 한 해를 정리하면서 편하게 이야기하는 건 어떨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ann 한 해를 정리한다면올해의 소설이나 올해의 책을 꼽아 보는 건가요?     

물론 그럴 수도 있죠. 황진하 아나운서가 생각하는 올해의 책은 뭔가요?

여기저기서 올해의 책을 많이 뽑기도 하죠. 방송 준비하면서 살펴보니까 정말 뽑는 곳이 많기도 하더라고요. 일단 교보문고가 뽑은 2017년 연간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면요. 1위가 언어의 온도, 2위가 82년생 김지영, 3위가 자존감 수업입니다. 독자들이 뽑은 올해의 소설에는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이 됐고요.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에는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 선정됐고요. 예스24 독자 투표에서는 82년생 김지영이 됐더라고요. 서점인이 뽑은 올해의 책이라는 것도 있는데 여기에는 82년생 김지영 말고도 아몬드, 명견만리,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 소리와 몸짓 같은 책들이 뽑혔네요.     


ann 올해의 책올해의 소설책밤지기는 다 읽었겠죠?     

조금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제가 좀 게으른 독서를 하는 편이거든요. 신간을 빠릿빠릿하게 찾아보기보다는 예전에 나온 책 중에서 꾸준히 좋은 평가를 받는 책들을 골라서 읽는 편이라고 할까요.. 그러다 보니까 올해의 책, 올해의 소설 이런 리스트에 든 책 중에서 못 읽은 것들도 좀 있는 편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올해의 소설 중에는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을 추천하고 싶고요. 김애란 작가는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같은 작품들이 유명하죠. 이번 소설집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고 외면해버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정말 읽어볼 만한 작품들입니다.     


ann 그렇군요그러면 오늘은 올해의 소설들을 살펴보는 건가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요. 올해의 소설이나 올해의 책은 저보다 더 책을 많이 읽는 전문가들이 많이 뽑았으니까요. 오늘은 그냥 철저하게 제 주관, 제 위주의 책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ann 책밤지기의 주관으로 고른 올해의 책?     

네. 그런데 책 전체를 소개하는 건 아니고요. 제가 올해 읽은 책 중에서 정말 좋았던 문장들을 뽑아봤습니다.      


ann 올해 나온 책이 아니고 올해 읽은 책인 거죠?     

맞습니다. 수십 년 전에 나온 책도 있고요. 올해 나온 책도 있고요. 세어보니까 올해 80권 정도의 책을 읽었더라고요. 한 권의 책에는 또 정말 많은 문장이 있잖아요. 그중에서 딱 5개만 뽑아봤습니다.     


ann 책밤지기가 고른 올해의 문장 6노래 한 곡 듣고 이야기 나눠볼게요.     

마이 앤트 메리의 그걸로도 충분해입니다.


M1 마이 앤트 메리 – 그걸로도 충분해

https://youtu.be/Ho3HzLHY5qI


ann 2017년의 마지막 날책밤지기가 고른 올해의 문장 살펴볼게요순서가 어떻게 되는 거죠?     

특별한 순서는 없고요. 제가 올해 읽은 소설 속에서 정말 좋았던 문장들을 고심 끝에 딱 6개만 골라봤습니다.     

ann 먼저 어떤 문장부터 소개해주실 건가요?     

첫 번째 소설은 20세기 미국 문학의 거장 중 한 명인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단편집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에서 골랐습니다.

“1918년 장인은 프랑스로 가서 드 아비양 비행기를 몰고 프랑스에 있는 한 기차역을 폭격했다. 한 번은 독일군 상공을 날고 있었는데, 작은 구름들이 그의 주위에 생겨났고 그는 그것들이 아름다워서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그것이 자기 비행기를 격추시키려는 독일군 방공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한 번은 그가 프랑스 영공을 날고 있었는데, 그의 비행기 뒤로 무지개가 나타나더니, 그가 방향을 선회할 때 역시 방향을 선회하면서 여전히 뒤따라오고 있었다.“     


ann 전쟁터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적군의 모습이 오히려 아름답게 보인 거네요.     

그렇죠. 본질을 알기 전에는 죽음에 이를 수 있는 폭력도 이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거죠.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설명할 때 목가적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허무를 잘 표현했다고 하거든요. 아름다운 작은 구름이나 무지개는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하는 게 맞겠죠. 그런데 이걸 발견한 곳이 하필 전쟁터라는 아이러니를 소설로 풀어낸 거죠.     


ann 작은 구름과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게 전쟁 무기라는 게 정말 아이러니하네요.     

다음에 소개해드릴 소설 속 문장도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는데요. 줄리언 반스의 ‘10과 2분의 1장으로 쓴 세계 역사’라는 소설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ann 10과 2분의 1장으로 쓴 세계 역사제목이 특이한데요?     

줄리언 반스가 1989년에 쓴 소설인데요. 전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포스트 모더니즘적으로 재해석을 한 소설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뭔가 엄청 어려워 보이는 데 실제로는 정말 재밌고 흥미진진한 책이고요. 재기 발랄하다고 해야 될까요. 그러면서도 역사와 예술, 인간 사회, 문화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를 담고 있는 책이죠.      


ann 책밤지기가 빠져든 문장은요?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도 긍정적인 면이 있으리라는 걸 압니다. 나쁜 일을 외면해버리면 일의 계속적 수행을 용이하게 하거든요. 그러나 나쁜 일을 무시하면 결국 나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게 됩니다. 당신들은 항상 나쁜 일들로 놀랍니다. 총이 사람을 죽이고, 돈이 사람을 부패시키고,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을 당신들은 놀라워하지요. 그런 순진성은 매력적일 수도 있지만, 슬프게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ann 당신들은 항상 나쁜 일들로 놀랍니다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을 당신들은 놀라워하지요뭔가 단순한 문장인데 뒤통수치는 느낌이 있네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모르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문장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좋지 않은 일, 나쁜 기억은 지우려고만 하잖아요. 그러니까 또 다른 하루를 살 수 있는 거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렇게 잊고, 지우기만 한다고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죠.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 그냥 잊어버리기만 하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줄리언 반스의 이 책은 그런 인간 역사의 순진무구함, 위험함에 대한 경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ann 노래 한 곡 듣고 다른 올해의 문장 만나볼게요.     

원디렉션의 히스토리입니다.


M2 one direction - history

https://youtu.be/yjmp8CoZBIo


ann 책밤지기가 읽은 올해의 문장. 2개를 먼저 살펴봤고요또 어떤 문장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올해 읽은 소설 중에 제가 제일 좋았던 소설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인데요. 거기에 나오는 문장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ann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어떤 문장인가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유럽에서 사제 수업을 받아요. 그때 신의 존재에 질문을 받는데 이렇게 답합니다.

"신이란 당신들처럼 인간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ann 신이란 인간 안에서 인간을 감싸는 거대한 생명이다뭔가 인상적인 문장인데요어떤 소설이죠?     

엔도 슈사쿠는 일본의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이고요. 일본에는 굉장히 드문 가톨릭이기도 합니다. 평생 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면서 종교 소설을 썼는데요. 아쿠타가와상,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같은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을 다 휩쓸었고요. 오늘 소개해드린 깊은 강은 엔도 슈사쿠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소설입니다. 본인은 가톨릭이었지만 배경은 인도의 바라나시죠.     


ann 가톨릭 사제와 인도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데요.

그렇죠. 그런데 작가가 계속해서 고민한 문제가 아까 읽어드린 문장에 그대로 나오는데요. 종교마다 서로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만 사실은 같은 게 아닐까. 그런 고민을 하는 거죠. 가톨릭 사제와 힌두의 나라인 인도를 그래서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를 풀어놓은 거고요. 가톨릭 사제가 이런 생각 때문에 정식으로 사제가 되지 못하지만, 마지막까지 인도의 가장 낮은 사람들인 불가촉천민들을 도우며 살아가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인 소설입니다.      


ann 다음 문장은요?     

이번에는 국내 작가의 소설에서 골라봤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의 단편인데요. 제목이 ‘낯빛 검스룩한 조선 시인’입니다.      

ann 김연수 작가의 신작이 나왔군요.     

아직 단행본이 나온 건 아니고요. 문학동네에 단편이 실렸고, 최근에 나온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에도 수상후보작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시인 백석의 이야기를 다룬 건데요. 김연수 작가가 원래 백석 시인에게 관심이 많거든요.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소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ann 문장을 소개해주세요.

소련에서 온 시인 마르가리타가 주인공에게 조선어로 바다를 어떻게 부르느냐고 물어요. 그러자 주인공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라고 하면, 조선인들은...” 그는 손을 들어 어둠 속 동해를 가리켰다.

“저절로 멀리 바라보게 됩니다. 바다는 멀리 바라보라는 소리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가만히 기행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동해는 두 사람의 바로 앞에 있었다.     


ann 바다는 멀리 바라보라는 소리입니다정말 아름다운 문장이네요.     

김연수 작가의 글은 문장이나 의미 어느 하나 놓칠 게 없죠. 특히나 이 소설은 시대와 작가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게 느껴져서 더 좋았던 소설입니다. 앞으로 나올 김연수 작가의 글은 또 달라질 것 같아서 더 기대가 된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소설입니다.     


M3 태연 – U R

https://youtu.be/SPkAluFgsqM


ann 책밤지기가 고른 올해의 문장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이번에는 어떤 소설에서 문장을 골랐나요?

저희 방송에서도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로맹 가리의 ‘하늘의 뿌리’라는 소설에서 골라봤습니다.     


ann 책밤지기가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죠로맹 가리단골손님입니다.     

100번을 소개해도 모자람이 없는 작가죠. 하늘의 뿌리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대사가 굉장히 인상적인데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허파도 없이 물 밖으로 뛰쳐나온 선사시대의 파충류를 예로 들면서요.

“그놈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오. 그놈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있지도 못할 거요. 그놈은 아마 간이 부었을 거요. 우리도 시도를 해봐야 하오. 그게 진보라는 거요. 그놈처럼 여러 번 해보면 아마도 우리는 결국 필요한 기관, 예를 들면 존엄이나 우애 같은 기관을 갖게 될 거요.”     

ann 존엄이나 우애가 지금의 인류에게는 없다는 뜻이군요.     

하늘의 뿌리는 단지 재미 삼아 아프리카 초원의 코끼리를 사냥하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그런 코끼리를 지키려는 주인공의 분투를 다룬 작품이고요. 그런데 누가 더 주류인지 보면 재미 삼아 코끼리를 죽이는 사람들이 인류의 주류에 서 있죠. 대부분의 사람은 코끼리를 지키도록 법을 개정할 수 있게 서명해달라는 주인공의 요청에 펜도 들지 않아요. 나가서 총을 들고 싸워달라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걸 작가인 로맹 가리는 아직 인류의 진화가 충분하지 않아서 존엄이나 우애 같은 기관이 없어서라고 돌려서 비판하는 거죠.     


ann 오늘 소개해준 올해의 문장들 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민들이 많은 것 같아요.     

소설 속에서 어떤 문장이 좋다고 하는 건 순전히 개인적인 선택이니까요. 문장들 사이에 뭐가 더 좋고 뭐가 나쁘고 할 건 없겠죠. 저도 소개할 문장들을 골라놓고 보니까 아무래도 제가 올 한 해 이런 고민을 많이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년에는 좀 더 희망찬 문장이나 소설을 소개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ann 마지막 곡도 소개해주세요.     

이디나 멘젤이 부른 what are you doing new year’s eve입니다.     


M4 idina  menzel -  what are you doing new year’s eve

https://youtu.be/StO1wLo--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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