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s교통방송 심야라디오 프로그램 황진하의 달콤한 밤'의 책 소개 코너 '소설 마시는 시간'입니다.
매주 토요일에서 일요일 넘어가는 자정에 95.1MHz에서 들으실 수 있어요.
11월 17일 백여섯 번째 방송은 한국을 떠난 한국인의 삶을 다룬 소설을 소개했습니다.
↓소설 마시는 시간 멘트↓
ann 책 속에 담긴 인생의 지혜를 음미해 보는 <소설 마시는 시간> 오늘은 어떤 주제로 이야기 나눠볼까요?
j 오늘은 두 편의 소설을 가져왔는데요. 한국을 떠난 한국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들입니다. 한국을 떠났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와 역사의 흐름 탓에 어쩔 수 없이 이역만리의 땅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두 편입니다.
ann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어떤 사람들일까요.
j 먼저 소개할 책은 '파친코'라는 제목의 소설입니다. 두 권으로 나뉜 장편소설인데요. 재미동포인 이민진 작가의 작품입니다. 이민진 작가는 저도 이 작품으로 처음 알게 된 소설가인데요. 굉장히 강렬한 인상이라고 할까요. 딱 한 작품만으로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ann 이민진 작가는 생소한데요. 조금 더 설명해주세요.
j 이민진 작가는 1968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는데요. 7살쯤 부모를 따라서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갑니다. 국적은 미국인이지만 한국 이름인 이민진을 그대로 쓰고 있고요. 2004년 첫 단편을 냈고, 2008년 첫 장편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에서 재미동포들의 삶을 그려내면서 미국에서 굉장한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2017년에 쓴 '파친코'라는 장편소설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지금은 제2의 제인 오스틴이라는 호평까지 받고 있다고 합니다. 파친코는 2017년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요, 미국 뉴욕타임스가 북리뷰에서 한 페이지를 통째로 써가며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썼을 정도로 대단한 반응을 얻었어요.
ann 대단한 평가를 받으면서 국내에 출간이 된 거네요. 어떤 작품인지 더 궁금해지는데요.
j 간략한 줄거리를 설명드리면요. 재미동포 작가가 쓴 소설이지만 재미동포의 삶이 아닌 재일동포, 자이니치의 삶을 다룬 이야기예요.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대부터 시작해 1980년대까지 거의 80년에 걸쳐서 한 한국인 가족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입니다.
ann 재미동포 작가가 재일동포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니까 뭔가 묘한 감정이 드네요.
j 재미동포나 재일동포나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는 이방인의 위치에 서 있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아무래도 동질감이 있을 것 같고요. 이민진 작가가 재일동포의 삶에 대해 처음 듣게 된 게 1989년에 한 선교사를 통해서래요. 사실 재미동포들은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크잖아요. 세탁소에서 시작해 큰 기업을 차리고 미국 주류사회에 진입하는 성공 스토리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재일동포의 사회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민진 작가가 굉장히 호기심을 가졌다고 해요. 재일동포들은 일본 사회의 밑에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으며 신음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요. 그러다 이민진 작가가 일본계 미국인인 남편을 만나서 도쿄에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 직접 재일동포들을 만나서 취재한 걸 가지고 소설을 쓰게 된 거죠.
M1 이한철 - 산책
ann 오늘은 조국을 떠난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만나보고 있어요. 먼저 재미동포 작가인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이야기 중입니다. 확실히 같은 재외동포지만 재미동포와 재일동포의 삶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일본에서 한국인이 받는 차별은 미국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게 있겠죠.
j 그런 차별에 주목을 해서 나온 소설이 바로 '파친코'인데요. 실제로 이민진 작가가 일본에서 사는 동안에도 그런 차별을 많이 겪었대요. 도쿄의 아파트에서 수리공사가 지연이 돼 항의했더니 '한국인은 늘 불평만 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요. 미국인이라는 국적이 있는데도 그랬으니 일본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야 했던 재일동포의 삶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가죠.
ann 그런데 파친코라는 제목은 어떤 의미인가요? 소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볼까요?
j 파친코는 재일동포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업이에요. 폭력과 도박을 연상케 하지만 재일동포의 신분에서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다 보니 과거에는 많은 재일동포가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또 파친코라는 도박은 결국 누구도 결과를 알 수 없잖아요. 알 수 없는 도박에 운명을 건다는 점에서도 재일동포의 삶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고요.
ann 아까 줄거리 설명에서 191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긴 이야기를 다룬다고 했는데요. 그러면 등장인물도 굉장히 많겠네요.
j 부산 영도에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요. 가난한 집의 막내딸 양진이 언청이에 절름발이인 훈이와 결혼합니다. 훈이의 집으로부터 돈을 받고 막내딸을 넘긴 거죠. 양진은 그런 삶을 받아들여요.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참고 겪으며 일합니다. 둘 사이에 선자라는 딸이 태어나는데요. 그 선자가 한수라는 중년의 남자에게 빠져서 덜컥 아이를 갖게 돼요. 그런데 한수가 사실은 유부남이었던 거죠.
ann 일제강점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더는 동네에 살 수 없었겠네요.
j 그때 목사인 이삭이 선자를 아내로 받아줘요. 그리고 그 둘은 이삭의 형이 살고 있는 일본 오사카로 향합니다. 더는 고향에서 지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일본행을 택한 거죠. 일본에서 선자와 이삭 부부는 두 아이를 키워요. 선자가 한수에게서 얻은 첫째 노아, 그리고 선자가 이삭과 결혼한 뒤 낳은 둘째 모자 수예요. 소설의 중반부부터는 선자와 이삭, 둘의 아이인 노아와 모자수, 그리고 이삭의 형인 요셉 부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ann 가뜩이나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을 시기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일본으로 향했으니 이들 가족이 겪었을 어려움이나 고통이 어땠을지 짐작도 가지 않네요.
j 우리가 상상만으로는 도저히 그릴 수 없는 초기 재일동포의 삶을 이민진 작가는 풍부한 취재를 통해서 재현해놨다는 게 대단한 점인데요. 이삭 부부와 요셉 부부, 그리고 두 아이인 노아와 모자수가 온갖 노력과 경쟁으로 꿋꿋하게 앞으로 전진하면서 일본인에게 받는 모멸과 차별의 현장이 정말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성공해도 이들 가족에게 붙은 자이니치라는 꼬리표는 사라지지 않는 거죠.
ann 재일동포의 삶은 어떻게 보면 완전한 이방인이었던 거잖아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모두 버림받은 삶..
그 말이 정확한 것 같아요. 소설에 이런 말이 나와요.
j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일본을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를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이런 말도 있고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애국자나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재수 없는 개자식이나 다들 먹고살려고 애쓰는 만 명의 동포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결국 굶주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M2 브로콜리너마저 - 춤
ann 오늘은 조국을 떠난 한국인의 삶을 다룬 소설 만나보고 있어요. ‘파친코’라는 소설을 먼저 만나봤는데요. 재일동포들이 겪었을 어려움이 소설만으로도 느껴지네요.
j 이 소설의 첫 문장이 굉장히 인상 깊은데요.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문장으로 이 긴 소설이 시작해요. 이 소설이 미국에서 굉장한 호평을 받은 것도 이런 지점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어떤 거대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해하잖아요. 일제강점기의 역사는 우리에게 독립과 해방의 투쟁을 중심으로 쓰여 있기 마련이죠. 그런데 그 순간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은 단지 살아남기 위한 투쟁, 삶을 이어가기 위한 투쟁에 온 몸을 내던지고 있었던 거잖아요. '파친코'는 그렇게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잊히기 쉬운 한 개인의 이야기,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시 발굴해낸 거죠.
ann 이민진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야겠어요.
j 얼마 전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에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어보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거든요. 이 글에서 오바마 전 대통령은 "회복과 연민에 대한 강력한 소설"이라고 추천했어요. 이민진 작가는 앞으로의 활동이 더 기대가 되는데요. 본인이 스스로 '코리안 3부작'이라고 부른 3편의 소설 중 마지막 소설을 작업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제목이 흥미로워요. '아메리칸 학원'이라는 제목이라고 합니다. 한국인만의 교육관이나 교육 방식에 대해 미국 사회에서 굉장히 관심이 많다고 해요. 그런 부분에 대해 재미동포의 관점에서 바라본 소설이라고 하는데요. 어떤 작품이 나올지 기대가 큽니다.
ann 한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두 번째로 어떤 작품 만나볼까요?
j 이번에 소개할 책은 김영하 작가의 '검은꽃'입니다. 이 소설은 아마 이미 읽은 분도 많을 것 같은데요.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김영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죠.
ann 김영하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 소설이기도 하죠?
j 저도 처음 읽었을 때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요. 김영하 작가라고 하면 약간 도시적인 느낌이 있는데 이 소설은 정말 역사소설의 정수 같은 느낌이거든요. 이런 소설을 김영하 작가가 썼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또 읽고 나서는 이래서 썼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ann '검은꽃' 어떤 소설인지 이야기해볼까요.
j 조선시대인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러시아와 일본이 대한제국을 놓고 전쟁을 벌이던 즈음이에요. 이때 영국 기선인 일포드 호가 조선인 1033명을 싣고 제물포항을 출발해 멕시코로 향해요. 양반에서부터 상인, 평민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을 싣고 떠난 거죠. 대한제국의 상황이 워낙 안 좋다 보니 좋은 일자리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난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그들이 마주친 현실은 말도 통하지 않고 기후도 완전히 다른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거였죠.
M3 이적 – 같이 걸을까
ann 오늘은 조국을 떠난 한국인의 삶을 다룬 소설 만나보고 있어요. 두 번째로 김영하 작가의 ‘검은 꽃’ 이야기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애니깽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룬 거네요.
j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에 팔려간 조선인 노동자를 애니깽이라고 부르죠. 영화로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고요. 4년이라는 계약기간을 참으면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4년이 지나고 보니 돌아갈 고향 자체가 사라졌죠.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무너지면서 돌아갈 땅마저 사라진 거죠. 그 뒤에 1000명이 넘는 조선인 이주자들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멕시코 전역을 떠돌아다니게 되는 이야기가 검은꽃의 주된 줄거리입니다.
ann 그 상황에서 얼마나 막막했을지 짐작도 안 되죠.
j 나중에 이들이 과테말라 북부 밀림지대에 '신대한'이라는 나라까지 세우게 돼요. 돌아갈 곳이 없는 이들에게 대한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보면 마지막으로 남은 재산 같은 게 아닐까 싶어요. 결국에는 모두 사라지게 되지만요. 이 소설은 희망적인 것도 없고, 연대의 가치에 대한 것도 없어요. 조선인들이 고향을 떠나 먼 이국 땅에서 떠돌다 끝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을 뿐이죠.
ann 한국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소설 이야기해봤는데요. 또 읽어볼 만한 작품이 있을까요?
j 몇 권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 있는데요. 한국계 프랑스 작가인 엘리자 수아 뒤사팽의 '파친코 구슬'이라는 소설도 있어요. '속초에서의 겨울'이라는 소설로 프랑스에서 신인상을 받기도 했는데요. 저희 방송에서도 한 번 소개해드렸죠. 뒤사팽이 지난해 '파친코 구슬'이라는 새 소설을 내놨는데요. 한국계 스위스 여성인 클레르가 일본 도쿄에서 파친코 사업을 하는 외할머니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처음 소개해드린 '파친코'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죠. 재미동포인 이창래 작가의 작품도 재외 한국소설 중에서 주목받고 있는데요. '가족'이나 '영원한 이방인' 같은 작품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M4 이상은 – 삶은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