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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Feb 29. 2016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을 따라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부다페스트의 골목길에 숨어 있는 작은 레스토랑 <키슈피파 kispipa>에는 한 음악가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어두운 배경에 잠겨 있는 이 음악가의 이름은 레조 세레스. 자살의 송가로 유명한 <글루미 선데이 gloomy sunday>의 작곡가다. 키슈피파는 레조 세레스가 피아노를 연주했던 곳이라고 한다.

키슈피파 벽에 걸려 있는 레조 세레스의 초상화. /키슈피파 홈페이지

연인들의 날인 2월 14일 오후에 키슈피파를 찾았다. 레스토랑에는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커플과 오랜 단골처럼 보이는 노인들이 군데군데 앉아 있었다. 레스토랑과 함께 나이를 먹은 듯한 매니저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어딘가에서 보다 젊은(그렇지만 50대는 되어 보이는) 직원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입구에 서서 기다려야 했다. 


키슈피파는 대로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골목길에 있었다. 그 때문인지 관광객도 동양인도  찾아볼 수 없었다. 레스토랑은 역사를 말해주는 듯 낡았지만 정갈했고, 덕분에 고풍스러웠다. 레스토랑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밝은 전등 사이에 걸려 있는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레조 세레스의 초상화였다. 전등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가뜩이나 어두운 그림이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사진을 찍어도 그림자 속에서 레조 세레스의 얼굴을  끄집어내기 쉽지 않았다. 레조 세레스는 어둠보다 더 깊은 고요함 속에 있었다.

레조 세레스가 1933년 작곡한 <글루미 선데이>는 실연의 아픔을 담은 노래다. 원래 제목은 <Szomoru Aasarnap>. 집시 음악에 커피하우스 레퍼토리를 섞어 만든 헝가리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글루미 선데이라는 이름은 다른 나라에 전해지면서 붙었다. 이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고 8주 만에 헝가리에서만 190여 명이 자살을 택했다. 글루미 선데이를 듣고 난 이후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곡을 연주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차례로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자살의 송가라는 타이틀이 붙게 됐다. 이후 BBC 등 여러 라디오 방송국들이 이 곡을 틀지 않았고, 레조 세레스 역시 1968년 자살을 택했다. 비극의 완성이었다.


1999년에 나온 동명의 영화는 허구적인 상상력을 덧붙여 글루미 선데이의 신화를 아름답게 채색한다.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자보와 가난한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그리고 그 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일로나. 영화는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한 이들의 사랑과 좌절을 보여주고,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은 이 영화 전반을 관통하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비애감을 더한다. 영화에서도 글루미 선데이를 듣고 많은 이들이 자살을 택한다. 하지만 영화는 오래된 신화에 역사적인 해석을 더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묻게 된다. 그들은 이 노래 때문에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이 노래 덕분에 자살할 수 있었나?

영화 속에서 안드라스는 독일인 장교 앞에서 글루미 선데이를 연주하고 바로 자살한다. 일로나가 글루미 선데이의 피아노 반주에 가사를 붙여 노래했다. 그는 그 모습을 경탄하며 지켜봤고, 노래가 끝나자마자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죽은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룰 것도, 떨어질 곳도 없었다. 


독일군은 부다페스트의 모든 일상을 파괴한다. 자보는 레스토랑에서 사용할 양초나 식재료를 구하지 못하고, 끝내는 유대인 수용소에  끌려간다. 일로나는 사랑했던 두 남자를 독일군 때문에 모두 잃게 된다. 자살을 택한 이들은 역설적으로 그 선택 덕분에 자신들의 삶과 터전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됐다. 그들을 자살로 이끈 것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독일군의 총부리가 아니었을까. 그 숨 막히는 죽음의 냄새에 수많은 헝가리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닐까.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은 오히려 그들의 마지막을 차분하게 감싸준 담요가 아니었을까.


오래지 않아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굴라쉬 수프(goulash soup)와 치즈를 채운 헝가리식 돼지고기 튀김(breaded fillet of pork), 그리고 맥주 두 잔이었다. 영화에서 자보 레스토랑의 인기 메뉴로 나온 비프 롤을 찾아보려 했지만,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비슷해 보이는 음식을 골랐다. 피아노 선율 대신 나이 많은 매니저의 기침 소리와 오디오에서 나오는 잔잔한 음악 소리가 더해졌다. 영화 속에서 봤던 자보 레스토랑은 아니었지만, 키슈피파만으로 충분했다. 음식은 맛있었고, 사람들은 평온했다. 레조 세레스의 피아노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오랜 시간 레스토랑을 지켜왔을 매니저의 기침 소리가 그 부재를 채워줬다. 기침 소리. 손님들의 식사를 방해하지 않으려 잔뜩 소리를 죽인 그 기침 소리만으로도 레스토랑에 생기가 돌았다. 자살의 송가가 탄생했을 레스토랑에서 오히려 이 곳 사람들의 삶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키슈피파의 돼지고기 필레. 부드럽게 익은 돼지고기가 치즈와 잘 어울렸다.

자보와 안드라스, 일로나가 함께 보드카를 마시며 노래의 성공을 축하했던 어부의 요새, 일로나가 안드라스를 찾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건넌 세체니 다리. 부다페스트 곳곳에는 영화 속 풍경이 남아 있었다. 영화에 나온 1930년대의 부다페스트와 지금의 부다페스트 사이에는 시차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들이 지금은 다국적 관광객들의 차지가 됐다는 정도의 차이만이 있었다.


어부의 요새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도나우강 저편의 페스트 지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강변에 자리 잡은 화려한 건물들 너머 멀리에 작고 허름한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곳은 밤이 와도 불이 켜지지 않는 곳이었다. 아니, 불이 켜져도 관광객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을 만큼 작고 소박하게 밤을 밝히고 있을 것이다. 부다페스트에서 살아가는 200만의 헝가리인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죽음의 강을 넘고 넘어 지금도 부다페스트를 가꾸어 가고 있었다. 그들의 삶이 강 너머에 있었다.

자보와 안드라스, 일로나가 함께 걸었던 어부의 요새.
낮의 부다페스트는 화려하지도 섬세하지도 않다. 대신 헝가리 사람들을 닮아 굵고 직선적이고 어딘지 조금 우울한 구석이 있다.

키슈피파 레스토랑 http://www.kispipa.hu/en_index.html


프롤로그

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용기가 아닌 동기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야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은 빛이 아닌 어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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