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부다페스트의 중심지인 안드라시 거리에는 다른 건물들과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이 하나 있다. 안드라시 60번가에 있는 이 건물의 이름은 '테러하우스'다. 부다페스트의 샹젤리제라는 안드라시 거리에 걸맞지 않게 한 눈에 봐도 어둡고 칙칙한 느낌의 건물이다. 건물 위에는 'TERROR'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음산하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그런 건물이다.
건물의 정문 바로 앞에는 거대한 쇠사슬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그 옆에는 실제 베를린 장벽을 가져와 세워 놨다. 쇠사슬과 장벽. 테러하우스의 첫인상은 그렇게 서슬 퍼렇다. 건물 벽에는 한 줄로 사람들의 얼굴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들 아래에는 국화며 양초가 놓여 있다. 사진 속 사람들은 대부분 밝게 웃고 있다. 그들은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사진이 이런 건물의 벽에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쇠사슬과 장벽, 그리고 희생자들의 사진. 테러하우스는 그렇게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부슬비가 내리던 2월 13일 테러하우스를 찾았다. 부다페스트에서 방문한 곳 중 가장 사전 정보가 적었던 곳이다. 여행을 끝마친 지금은 이번 여행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이고 인상적인 경험을 한 곳이다. '테러하우스를 가보지 않고 부다페스트를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테러하우스는 헝가리인들에게 죽음의 건물이었다. 우리에게 서대문형무소와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었다면, 헝가리인들에게는 테러하우스가 있었다. 헝가리를 점령한 독일군은 안드라시 60번가를 사형집행인들의 본부로 삼았다. 그들은 이 건물에서 죽여야 할 사람과 살려야 할 사람을 결정했고, 그런 결정을 위해 고문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히틀러가 몰락하자 소련이 헝가리를 차지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사용했던 건물을 그대로 이어받아 정치경찰의 본부로 사용했다. 이 건물은 히틀러와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12년의 죽음의 통치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헝가리 사람들은 이 건물 근처에 오는 것도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 건물을 없애거나 바꾸지 않았다. 우리로 치면 명동이나 가로수길 한 복판에 있는 이 건물을 그때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보존하기로 했다. 오히려 건물 앞에 쇠사슬과 장벽을 세우고, 건물 위에는 테러라는 글자를 분명히 새겼다. 헝가리인들은 죽음을 애써 잊기보다 또렷하게 기억하기로 했다.
테러하우스는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다. 이번 여행 기간에 유럽의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을 갔다 왔지만, 테러하우스만큼 현대적이고 동선 배치가 치밀한 곳은 없었다. 테러하우스를 만든 사람들은 방문자가 헝가리의 잔혹했던 역사를 단 한 페이지도 놓치지 않게끔 치밀하게 동선을 설계했다.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거대한 탱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탱크는 수많은 희생자들의 사진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포신은 전시실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겨누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게 된다. 2층 전시실은 헝가리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독일군과 소련군, 그리고 정치경찰들의 행적을 폭로한다. 2차 세계대전 도중 수많은 헝가리인들,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도 스탈린에 의해 수많은 이들이 또다시 죽음을 당하거나 강제 이주됐다. 테러하우스는 이 죽음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희생자들의 유품, 정치경찰이 실제 사용했던 물건들, 당시의 영상 자료 등이 계속해서 이어지며 방문자에게 말을 건다.
누군가가 테러하우스를 한국의 전쟁기념관과 비슷하다고 쓴 글을 봤다. 하지만 그 둘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세운 전쟁기념관은 전쟁과 죽음, 그 공포를 거대한 유리벽 안에 박제해버렸다. 유리벽 안에 갇힌 공포는 박물관을 돌아보는 관람객의 피부에 직접 와닿지 못한다. 우리는 역사를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그 많은 죽음을 그저 박물관에 박제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테러하우스는 죽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관람객들에게 말한다. 관람객은 희생자의 육성을 듣고 사형집행자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테러하우스는 때때로 관람객의 발걸음을 억지로 멈춰 서라도 죽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외친다.
1층 전시실까지 관람을 마친 관람객들은 다음 관람을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지하 전시실로 가기 위한 엘리베이터다. 테러하우스의 직원은 관람객이 가득 탈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엘리베이터를 출발시킨다. 1층에서 지하까지 단 한 층을 이동하는데 5분은 걸린다. 엘리베이터는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하강한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들은 죽음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 순간 엘리베이터는 유대인을 태우고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열차처럼 사람들의 목을 조여 온다. 한 순간 엘리베이터는 거대한 관이 된다. 엘리베이터에 탄 관람객은 꼼짝없이 죽음의 순간에 동참하게 되고, 희생자들이 느꼈을 공포와 슬픔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
테러하우스에는 자유가 없다. 헝가리인들은 부단히도 죽음을 기억하게끔 한다. 지하 전시실은 감옥과 고문실, 죽어간 이들을 추도하는 공간으로 이어진다. 어둡고 음침한 공간을 걷다 보면 내 발걸음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걸을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게 된다.
테러하우스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사진으로 가득 찬 복도를 지나야 한다. 처음 테러하우스의 입구에서 봤던 것처럼 희생자들의 얼굴인가 싶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자 대부분의 사람이 군복이나 제복을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VICTIMISERS. 그들은 수많은 헝가리인들을 죽게 만든 군인이나 정치경찰, 정치인들이었다. 사진 밑에는 작은 글씨로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어떤 직책이었는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표시됐다. 헝가리인들에게 히틀러와 스탈린의 시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들이 죽음을 잊지 않고 부단히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다. 비슷한 역사를 지닌 우리의 노력을 되돌아본다. 위안부와 노근리 주민들, 친일파와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정치경찰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되돌아본다. 우리에게도 죽음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부다페스트에서는 죽음을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다. 도나우 강변에는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은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신발들이 놓여 있다. 주인 없는 신발 동상들이 강을 향하고 있다. 누구나 그 신발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누구나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사울이 될 수 있다.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우리가 그 끔찍한 죽음의 역사를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다.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this is the core of what we have to say."
테러하우스 http://www.terrorhaza.hu/?language=eng
사울의 아들 https://www.facebook.com/beetwinfandi
프롤로그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