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영실코스 등산
한라산은 고도에 따라 모습을 달리 하는 카멜레온 같은 산이다. 등산로 초입에서 올려다보는 산의 모습과 산의 허리춤에서 내려다보는 산의 초입이 다르고, 산정 부근에 다다르면 밑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이번 제주 여행의 하이라이트도 단연 한라산 등산이었다.
1년에 등산이라고는 두세 번이 고작이기 때문에 한라산 등산도 코스가 중요했다. 너무 오래 걸리거나 지나치게 어려운 코스는 제외했다. 여러 코스 중에서 고른 곳이 영실코스였다. 가파도에서 나오자마자 중문으로 이동해 숙소를 잡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서둘러 택시를 타고 영실휴게소로 향했다. 영실매표소에서 추가로 택시비를 지불하고 휴게소까지 한 번에 올라갔다. 영실휴게소에서부터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됐다.
영실코스는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대신에 한라산의 절경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볼 수 있는 코스다. 영실휴게소에서 병풍바위까지 1.5km, 병풍바위에서 윗세오름까지 2.2km, 마지막으로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까지 2.1km다. 이 중에서도 병풍바위까지 오르는 구간이 가장 험난하다. 이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평탄하기 때문에 나 같은 등산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저 병풍바위 구간이다.
정말로 병풍바위를 오르다 까마귀들에게 먹혀 죽는 상상까지 했다. 영실휴게소에서 조금만 오르면 바로 병풍바위가 나타난다. 병풍바위 옆으로는 제주도를 지켜준다는 오백나한이 줄지어 서 있다. 등산로는 여기서부터 나무 계단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구간을 오르는 것이 쉽지 않다. 거의 30~40여분 동안 나무 계단을 계속해서 올라야 했다. 중간중간 계단에 걸터앉아 쉬면서 병풍바위의 장대한 위용에 넋을 놓지 않았다면 마저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병풍바위와 오백나한 바위를 아우르는 영실 기암은 제주도 사람들에게 단순한 산 이상의 의미다. 일본 학자 이즈미 세이치가 쓴 <제주도>에는 영실 기암에 얽힌 제주도 민간 설화가 나온다. 이 설화에 따르면 오백나한 바위에서 두 명의 아름다운 자매 신이 솟아올랐는데, 언니는 아황, 동생은 여영이었다. 이 둘은 따로 떨어져 자신들의 낭군인 한라부악의 신을 찾아 나섰다는 설화다. 또 오백나한은 전쟁 같은 외침으로부터 제주도를 지켜준다는 이야기도 있다.
영실코스의 장점은 여기에 있다. 산 쪽을 보면 병풍바위를 비롯한 영실기암의 어마어마한 위용에 감탄하고, 고개를 돌려 바다 쪽을 보면 망망대해에 시선을 뺏기게 된다. 등산로를 맴도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환상적인 풍경이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중간중간 쉬면서 계단 코스를 오르다 보면 구상나무 숲이 나온다. 구상나무들은 이파리가 하나도 없는 채로 하얗게 벌거벗은 모습이었는데 대부분 고사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뉴스에서 국내 침엽수가 집단 고사한다는 소식을 본 적이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계속 걷다 보면 나무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거대한 평야가 나타난다. 한라산 선작지왓이다.
선작지왓은 영실코스에 있는 평원 지대다. 스위스나 이탈리아의 고원 지대를 떠올리게 만드는 선상 평원 지대다. 다른 것이 있다면 선작지왓에서는 바다가 보인다는 것이다. 해발 1700m 산 위에 자리 잡은 거대한 평원에서 보이는 바다. 이 거짓말 같은 풍경이 한라산 영실코스를 오르면 나타난다. 5월에는 이 곳에 진달래, 철쭉 같은 봄꽃들이 만개해 장관을 이룬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4월에는 꽃을 볼 수 없었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산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등산로를 걸었다.
병풍바위를 지나면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는 20여분 정도 걸린다. 윗세오름 대피소 앞에 마련된 나무 데크에서 준비해온 김밥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남벽분기점으로 출발했다. 많은 사람이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만 오르고 마는데, 시간이 충분하다면 남벽분기점까지 꼭 가보길 추천한다. 대피소에서 남벽분기점까지는 왕복으로 1시간 40분 정도 거리고, 힘든 코스도 없다. 대신에 백록담 남벽과 산상 평원 지대, 그리고 제주 앞바다를 더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다.
4월의 한라산에는 채 녹지 않은 눈이 곳곳에 있었다. 윗세오름까지는 눈을 볼 수 없었지만, 남벽분기점으로 출발하자마자 눈 덮인 길을 지나야 했다. 눈이 녹으면서 미끄러워졌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윗세오름 대피소부터는 등산객의 숫자가 확 줄어들기 때문에 더 차분한 마음으로 산을 즐길 수 있다. 등산로는 용암이 굳어지면서 만들어진 울퉁불퉁한 돌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걷기에 조금 불편했다. 이런 것도 한라산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남벽분기점까지는 고산 평원 지대를 따라 평탄한 길이 계속 이어졌다. 백록담의 남쪽 벽을 바라보면서 동쪽으로는 도는 식이었다. 이런 고산 평원 위에 또다시 깎아내리는 듯한 절벽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라산 남벽은 국내 최대 규모의 암벽이다. 절벽 높이만 300m에 이른다. 웬만한 동네 뒷산은 백록담 안에 들어갈 정도다. 남벽을 보면서 걷고 있으면 바람이 계속해서 땀을 식혀 주는데, 바다에서 불어오는지, 산에서 불어오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남벽분기점은 작은 전망대가 전부다. 전에는 남벽분기점에서 백록담까지 오르는 등산로가 있었지만, 지금은 막혀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암벽과 국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바다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윗세오름 대피소로 돌아왔다.
병풍바위 구간은 하산도 쉽지 않았다. 나무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조심조심 밟아 내려와야 했다. 산을 내려가는 도중에 몇몇 등산객이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고 왔다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등산에 자신이 있다면 운동화까지는 무방한 코스지만, 청바지나 숄더백을 메고 오르기에는 벅차 보였다. 아무리 쉬운 코스라고 해도 한국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영실휴게소에 다시 내려오니 오후 1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오전 8시 40분에 출발해 4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 중문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는 영실매표소까지 2.5km를 걸어서 내려갔다. 차도가 있지만 여기도 한라산 중턱이라 제법 등산하는 기분이 났다.
영실코스는 백록담을 제외한 한라산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코스다. 녹지 않은 눈이 말해 주듯이 한라산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높은 고도 탓에 한라산에서는 계절이 지체된다. 5월이면 산철쭉과 진달래가 선작지왓에 만개한다고 한다. 지나가는 봄이 아쉬운 사람이라면 5월의 한라산 영실코스를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제주시와 중문을 잇는 740번 시외버스가 영실매표소까지 간다. 하지만 오전 9시는 돼야 운행을 시작하고 배차간격도 50분 정도이기 때문에 미리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중문사거리에서 영실휴게소까지 택시비는 2만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