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청보리길 걷기
폭풍우가 지나간 다음날 아침 바다는 거짓말처럼 잔잔했다. 모슬포항 바로 옆에 잡은 숙소는 폭풍우가 지나가는 길 한 가운데 있었고, 창문을 때리는 비바람 소리에 밤새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창 틈으로 빗물이 새어 들어올 정도로 강한 비바람이었다. 하지만 폭풍우가 지나간 아침의 바다는 고요하고 잔잔했다. 소금이 잔뜩 묻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유람선 선착장으로 향했다. 모슬포항은 가파도와 마라도를 잇는 중요한 항구다. 전날 폭풍우 때문에 배가 취소된 탓인지 아침 일찍부터 많은 사람이 선착장에 몰려 있었다. 줄을 서서 가파도행 유람선 표를 사고, 250명이 탈 수 있는 배에 올라탔다.
가파도는 모슬포항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다. 짧은 거리지만 바다로 나오자 파도가 높게 치기 시작했다. 항구를 벗어난 바다에는 아직 폭풍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가파도는 작고 낮은 섬이다. 섬 전체가 낮고 평평하다. 오르막이라고 할 만한 곳도 없다. 섬 중앙에 있는 마을회관 건물이 그나마 지대가 약간 높은 편이다. 그곳에 서면 섬 전체가 한 눈에 보인다. 푸른 청보리밭이 섬을 뒤덮고 있고, 바다와 제주도 산방산이 멀리 보인다. 청보리의 푸른 물결이 최고조에 달하는 4월 중순에 청보리 축제가 열리고 많은 관광객이 섬을 방문한다.
가파도는 섬 전체를 걸어서 둘러보는데 2시간이면 충분하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서쪽 방향의 해안길로 걷기 시작했다. 가파도 올레길은 해안길을 따라가다 섬 안의 청보리밭으로 이어지고 다시 반대편 해안길로 빠져나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해안길은 바다와 청보리밭 사이로 이어져 있는데 양쪽 모두 아름다운 풍경이 계속되기 때문에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고민이었다.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재미도 일품이고, 청보리밭 사이에 우뚝 솟은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것을 보는 재미도 그에 못지않다. 해안길에 만들어진 정자에서 잠깐씩 쉬어가며 걷다 보며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청보리밭으로 향한다.
청보리밭은 초록의 물결이다. 가파도는 제주의 섬 답게 바람이 쉴 새 없이 부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청보리밭도 이리저리 춤춘다. 돌담 너머로 초록 물결이 일렁이는 것을 보는 것만 해도 장관이다. 올레길을 걸으면 청보리밭과 바다가 이어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바다 너머 제주도의 산방산까지 보이기도 한다. 이 지점에는 어마어마한 카메라를 들고 온 사진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청보리밭과 바다와 산방산을 놓치지 않으려고 여기저기서 셔터 누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청보리 축제를 하루 앞둔 탓인지 가파도 마을 사람들은 축제 준비에 바쁜 모습이었다. 남자들은 섬 여기저기를 다니며 허수아비를 세우고 있었다. 여자들은 섬 여기저기서 물질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상동마을에서는 수십 명의 잠녀(해녀)들이 모여 톳과 미역을 채취하고 있었다. 잠녀들은 두 명씩 짝을 이뤄 바다 안으로 들어갔다. 잠녀들의 작업 모습을 TV가 아닌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방파제에 서서 잠녀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특히나 숨비 소리가 인상적이었다. 물에서 나올 때마다 '퓌히'하는 소리가 항구 가득 울려 퍼졌다. 지금도 가파도 여자의 절반 정도가 잠녀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여행을 가면 이런 식으로 그곳 사람들의 생활을 엿보게 된다. 여행지에는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과 관광객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는데, 이따금 그 경계 너머의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진다. 우연히 마주친 잠녀들의 작업 현장을 유심히 관찰한 것도 그런 경우였고, 가파초등학교의 학생들이 푸른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모습을 바라본 것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가파초등학교는 섬을 닮아 작고 푸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푸른 청보리밭을 두고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매일 걷고 싶은 이 길을 이곳 사람들은 정말 매일 걸을까.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 길을 걸었다.
청보리밭을 지나면 다시 섬 동쪽의 해안길이 나온다. 제주도를 등 뒤에 두고 걷게 되는데 이곳의 바다 풍경도 서쪽 못지않게 아름답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돌 틈에는 이런저런 꽃들이 피어 있었다. 해안길 바로 옆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작은 봉분 여러 개가 바다를 바라보며 있었다. 작은 들꽃이 공동묘지 가득 피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묘지였다.
공동묘지를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마을이 나온다. 올레길도 여기서 끝이 난다. 마을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식당과 등대, 슈퍼마켓이 있다. 모슬포항을 출발한 배가 도착한 상동마을에서 이곳 하동마을까지 직선으로는 10여분 남짓한 거리다. 지척지간에 청보리밭이 펼쳐져 있다. 배 시간이 가까이 와서 다시 선착장으로 향했다. 청보리밭을 다시 지나며 이번에는 카메라를 꺼내지 않고 눈으로만 즐겼다.
가파도 청보리 축제는 5월 8일까지입니다. 모슬포항에서 1시간이나 2시간마다 배가 있습니다. 저는 오전 9시 배로 모슬포항을 출발해 오전 11시 25분 배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