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걷다걷따

제주의 해는 바다로 퇴근합니다

제주 사라봉 해넘이

by 이기자

매년 제주도를 찾으면서도 제주시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제주시는 언제나 제주 여행의 관문 같은 곳이었다. 제주공항에 내리면 시외버스를 타고 서쪽이나 동쪽으로 떠나기에 바빴다. 제주를 찾아갈 때마다 도시에 지쳤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제주시내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제주시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이번 제주 여행의 마지막 밤을 제주시내에서 보내게 됐다. 동문시장 근처에 숙소를 잡고 저녁 먹기 전까지 조금 남은 시간을 허투루 쓰기 아까워 근처에 가볼 만한 곳을 찾아봤다.


마침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에 사라봉을 오르는 올레길이 있다는 포스팅을 보고 숙소를 나섰다. 동문시장에서 동쪽으로 큰길을 따라 걷다 보니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올레길 18코스와 이어지는 길이다. 사라봉은 제주항 뒤쪽에 자리 잡은 150m 높이의 작은 산이다. 계단을 조금 오르면 제주항의 모습이 나오고, 그 앞으로 제주 앞바다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바다 위에 붉은 해가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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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봉에서 보는 일몰은 '사봉낙조'라고 해서 영주 10경의 하나다. 영주 10경은 제주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열 곳의 경관을 말한다. 어디를 가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풍경이 펼쳐지는 제주에서도 특히나 아름다운 곳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풍경을 자랑하는 뜻이다. 사라봉에서 바라보는 해넘이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넘이인 셈이다.


제1경 성산일출

제2경 사봉낙조

제3경 영구춘화 - 들렁귀의 봄꽃

제4경 정방하폭 - 정방폭포의 여름

제5경 귤림추색 - 귤림의 가을

제6경 녹담만설 - 백록담의 겨울

제7경 영실기암 - 영실의 바위들

제8경 산방굴사 - 산방산의 굴 절

제9경 산포조어 - 산지포구

제10경 고수목마 - 풀밭의 말


사라봉 위의 정자에는 이미 해넘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렇다고 수십 명이 모인 것은 아니고 기껏 열명도 채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카메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담기 바빴다. 카메라가 없는 사람들은 정자에 걸터앉아 조용히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동네 주민들은 일상적인 풍경인 듯 해넘이에 신경 쓰지 않고 운동기구에서 열심히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풍경을 처음 접한 사람에게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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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 낙조가 아름다운 이유는 제주항의 고즈넉한 풍경과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행기가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작은 어선이 제주항을 이따금 드나들고 있는 와중에 하늘에는 5분에 한 대씩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있다. 비행기는 붉은 해의 바로 위로 지나가는데 이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환상적이다. 거대한 해에 비하면 비행기는 개미처럼 작게만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 작은 비행기가 끝내는 해를 넘어서 하늘 위로 사라지는 모습을 넋을 놓고 보게 된다. 비행기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싶으면 멀리서 새로운 비행기 엔진 소리가 들리고, 가끔씩 털털거리는 뱃소리도 해넘이와 함께 한다. 하루 동안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한 해는 바다 너머로 퇴근하고, 비행기도 배도 자신의 안식처를 찾아간다.


해는 점점 수평선에 맞닿아 간다. 어느새 구름 위에 걸쳐 있던 해는 구름 아래에 반쯤 모습을 감췄다. 붉게 타오르던 바다와 하늘에 점점 퍼런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카메라 프레임 아래쪽에 푸른빛이 맺힌다. 이런 장관이 20여분 정도 이어진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도 붉은 기운은 한동안 하늘을 적시는데, 사람들도 아쉬움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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