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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by 빛나는 지금

시간이 정직하게 많이 흘렀다.


아빠를 보내고

알게 된 것은

아주 가까운 사람을 보내고 나면

그 사람과 관련된 가장 작고 소소한 것들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이었다.


가족이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큰 일이라

이후 내 삶은 그 이전과 똑같아질 수 없었는데

그렇게 일상이 휘청거릴 때

날 위로해 주고 하루를 통과하고 때로는 견디도록

붙들어주었던 것은

아빠가 남겨놓고 가신 참 작은 것들이었다.


아빠가 늘 신고 다니시던 신발.


아빠가 경조사 때만 신으셨던 정장구두는 아직

굽도 닳지 않고 가죽도 반질반질해서

아빠의 흔적도 그만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빠가 너무나 보고 싶을 때면

현관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아빠가 늘 신고 다니시던 낡은 운동화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앞축도 뒤축도 다 까졌고

아빠의 걸음새에 맞춰 밑창도 한쪽이 더 기울어져버린

운동화.


깔개는 군데군데 얼룩이 묻어 까이고

흰색 운동화 겉가죽은 벗겨지고

헤어져서 아마 더 오래는 신지도 못하셨을

낡은 운동화.


아빠는 그 운동화를 신고

집을 정리하시고

장을 봐오시고

자전거를 타고

가까운 친구도 만나고 오시고

손자들의 하굣길을 꼬박꼬박 챙기셨다.


긴 오후 햇살 아래

낡디 낡은 운동화를 보며

아빠가 늘 그 운동화를 먼저 신고

가족들을 기다리시며

그 현관에 앉아계셨던 모습을 오래오래 떠올리고 떠올렸다.


아빠의 뒷모습. 아빠의 웃음. 목소리. 신발에 코를 갖다 대면

아직도 남아있을 것 같은 아빠의 냄새.


그렇게 나는 그리움이 참 시리도록 아프다는 것을

느끼며 울다가 또 그 눈물을 훔치고

밥을 먹고 하루를 통과했다.


이후, 신발. 누군가가 늘 오래 신어서

낡아버린 신발을 보면 괜스레 눈길이 한번 더 간다.


낡은 신발을 보면 지저분하다는 생각보다는

그게 누구의 것이든 그 누군가가 조금은 늘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 신발을 신고

오늘도 나름의 진심을 다하여 성실하게 살고자

동분서주했을 그 누군가의 수고가

그려진다.


그렇게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힘든 시간들을 또 통과하며

외롭고 고독한 한숨을 내쉴 누군가의

처진 어깨가 그려지고,


자신만의 소망을 자유롭게 펼쳐보려다

어느새

다른 이를 책임져야 할 자리에 서게 되어

묵묵히 그 책임의 무게를 감내하느라

때로는 아픈 무릎으로 쉬지도 못한 채

'아얏'소리를 속으로 삼키며

다시 삶의 차가움을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춥고 서러운 시간들이 그려진다.


누군가도 때로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얼마나 그 옛날처럼 그저 엄마뒤에

숨어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을까.


그럼에도

이제는 나 아닌 다른 이의

우산이 되어주기 위해

숨을 수 있는 치마폭이 되어주기 위해

내일도 다시 그 낡은 신발을 신고

길을 나서는

수많은 누군가들.


그 생면부지의 누군가들이 그들의 낡은 신발에서 그려진다.


어제는 문득 내 신발을 보았다.

내가 요 근래 제일 오래 신고 다니는 슬리퍼.

집안일하며 아이들 돌보며

늘 신고 다니는 그 신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 묻었는지 고춧가루가 어딘가 튀었다.

발바닥이 닿는 부분은 닳아서 반들반들해졌다.

살 때 가장 저렴한 걸 고르느라

디자인도 색깔도 전혀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 발을 받치고 있는 가장 든든한 친구 같은 존재.


그 신발을 보다 보니

내가 조금 안쓰러웠다.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보듬지 못한 채

해야 할 것들을 하느라

조금씩 지쳐버린 나 자신을 그 신발은 잘 안다는 듯

적당히 낡고 헤어져있었다.


아빠를 보내고

오랜 시간 마음이 아팠던 것은

아빠에게 더 다정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내 삶이 전부여서

늘 아빠의 질문에도 무뚝뚝했고

건성으로 짧게 대답했다.


조금만 다정하게 아빠를 대했더라면

조금만 더 아빠와의 시간에 집중했더라면...


못난 후회들은 그 자체로 아무 힘이 없었지만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어제 문득 내 신발을 보며 다짐했다.


그래... 나 자신에게 조금만 더 다정해지자.

다그치지 말고

왜 그 모양이냐고

야단치지 말고

다정하게 대해주자.


흐트러진 내 신발을 가지런히 모으며

그렇게 가만히 내 마음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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