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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사나요?

집에 대한 생각

by 빛나는 지금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사람들은 거의 " 어디 사니?"라고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 어디 가게 뒤에 골목을 따라 들어가다가 왼쪽으로 꺾고 끝에서부터 두 번째 초록색 대문집이에요."라고 답했다.


그래도 헷갈려하는 표정이면 "대문에 ooo라고 문패가 걸려 있어요."라든가, "감나무 한그루랑 좀 더 뒤쪽에 소나무도 한그루 서있어요."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요새는 "어느 아파트에 사나요?"라고 묻는다. 아파트 이름만 대면 바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니 더 수월해지기는 했다.


나는 오랫동안 주택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은 2층짜리 큰 집에 살았다. 아마도 그 집이 내가 여태껏 살아온 집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쓰러지시기 전까지 그 집의 아래 위층을 다니시면서 화단을 가꾸고 어디선가 나무를 구해오셔서 우체통이며 새집도 만드시면서 주택살이를 재미있게 누리셨다.


우리 어린 두 조카도 여름이면 큰 고무 대야를 마당에 꺼내놓고 할아버지가 가득 물을 받아 주시면 물놀이를 하면서 여름을 났다. 그랬던 집이 아빠가 가시고 이전보다 두 배는 커지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휑해지는 것 같더니 결국 집의 크기만큼 무겁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왔다.


혼자 남으신 엄마는 첫해는 꾸역꾸역 혼자서라도 집을 돌보시고 장마 끝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웃자라는 잡초도 뽑아내시며 애를 쓰시다가 두 해째부터는 일당을 주고 사람을 불러 마당 정리를 하셨다. 그마저도 일을 마치고 나면 며칠을 앓아누우실 정도로 아빠가 가신 후 큰 집은 그 자체로 짐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와 주택은 다르다.

처음 이사를 하고 아파트에서 밤을 맞이했는데 두 가지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첫 번째는 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위층의 콩콩대는 발소리와

다 늦은 시간에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파트 단지 내의 조명의 밝은 빛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아빠를 보내고 환경을 바꾸고 아파트 주민이 되었다.


이제 엄마는 나이 들어 가장 잘한 것 중 하나가 아파트로 이사를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80을 바라보시는 엄마에게 안전하고 깔끔하고 편리한 아파트는 그 자체로 엄마의 삶의 질을 지켜주고 높여주는 최적의 주거 환경인 것이다. 이제 자녀들이 다 출가를 하고 처음 들어온 아파트도 크게 느껴지기 시작해 엄마는 다음 장소를 생각하고 계시는데 당연히 평수를 줄인 소형 아파트를 물색 중이시다.


결혼하고 첫 집을 고를 때도 고향으로 다시 내려와 아이들을 키울 집을 고를 때도

한 번도 아파트가 아닌 집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집은 곧 아파트였다.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가장 선택지가 많아서 고르기 쉽고 60% 넘는 인구가 사는 주거형태이니 그 자체로 검증받은 곳이고 정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곳이라 규제도 심하지만 필요 시 대출받기도 쉽다.


그럼에도 나는 집이라는 단어를 마주할때면

아주 어릴 적 자랐던 외갓집을 떠올린다.


너무 어릴 때 기억이라 분명하지 않고 꿈인 듯 흐릿하지만 뭔가 그 이미지와 분위기는 늘 남아있다.

흙벽에 낡은 벽지가 붙어있고 작은 창문이 나있는 아주 작고 좁은 방.

늦은 가을밤 무렵인 듯 창 밖으로는 옷깃을 여미게 하는 초겨울 공기가 흐르고

짙은 밤하늘을 배경 삼아 이제 하나 둘 남은 이파리를 떨구는 감나무의 가지가 검은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던 풍경.


두꺼운 이불을 두르고 아래는 군불을 때워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누워서 다섯 살 꼬마 아이는 그 풍경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다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외풍이 심해 두꺼운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자도 얼굴 부분은 늘 서늘했던 늦가을과 겨울의 밤. 밤. 창문을 닫아도 바람을 타고 있는 나무 가지의 흔들림은 박자도 리듬도 없는 타악기 소리처럼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었지만 그 무질서가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밖이 추울수록, 어두워질수록, 사람의 소리가 잦아들고 나무와 벌레와 낙엽이 덮인 흙의 뒤척임이 커질수록 오히려 집은 포근한 난로처럼 나를 덮어주었다. 그렇게 집은 나와 함께 숨을 쉬는 나보다 조금 더 큰 또 다른 생명 같았다.


집이란 단어는 항상 어릴 적 기억과 이미지를 동반한다.


나는 여전히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내 안 깊은 곳에서 이러한 집의 기억을 더듬거리며 찾고 있다.


집은 유형의 건물인 동시에 무형의 자신만의 생명을 지닌 듯한 살아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단순히 먹고, 자고, 씻는 행위 그 이상이다.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그리고 죽는다. 집은 그 모든 인생의 배경이다.

나에게 어릴 적 외갓집은 내 어린 시절의 가장 첫 기억이다. 그 첫 기억은 따뜻하고 안전하고 고즈넉하다.


그 느낌을 나는 여전히 찾고 있다.

그 집을 만나게 될까? 그 집을 나는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집을 찾는다. 나를 찾는다. 이 여정은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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